티스토리 뷰

지난주 일어났던 리퍼트 미국대사 피습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이 국내외 정치에 미치는 함의와 파장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조심스럽고, 이곳에서 지면을 빌려 언급하는 것이 불필요한 논란을 가중시킬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발생과 경과 과정을 차근차근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이곳에서 거칠게나마 시도해보려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이번 사건의 가해자인 김기종씨의 입장에서 본 사안을 음미해보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정신분열증으로 말미암은 개인적 습격이건 ‘종북’으로 인한 테러이건 확실한 것은 김씨가 원하는 바를 백이십 퍼센트 달성했다는 점이다. 김씨가 가장 원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 그리고 자기가 추구해온 ‘대의’가 주변의 웃음거리가 아니라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받는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을 뒤덮은 그의 이미지와 저간의 행적에 대한 매우 자세한 보도, 그가 평소에 주장하려고 하던 바에 대한 시시콜콜한 관심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혼자서 웃음 짓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열·과대망상과 테러리즘의 간극은 매우 좁아 보인다. 논란이 되는 테러냐 피습이냐의 구분은 사실 정치적인 구분이 아니라 외부적 관심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김씨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스스로에게 정치적 해석의 발언대를 주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장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 반면, 동기의 하찮음과 자신이 한 일의 우발성이 밝혀지는 일이야말로 김씨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이 ‘한·미공조에 대한 테러’라는 논평이나 국가보안법 적용을 통해 그를 정치범으로 격상하는 것은 그가 가장 원하는 바이며 북한이 가장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미국의 입장은 매우 흥미롭다. 피습 당사자인 미국대사는 피습 순간부터 시종일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미국의 정계나 언론이 예외 없이 이번 사건을 매우 우발적인 일로 격하하면서 ‘한·미동맹이 이 정도의 사안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수사와 재판 과정이 끝나기 전 섣부른 추정을 피하려는 당연한 태도이지만, 동시에 이번 사건이 야기할 외교적 파장에 대한 부담을 미국이 최소화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만약 피습 사건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이거나, 최소한 조직적인 것이라는 것을 미국이 인정한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비례적 제재’를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미국이나 우리 정부나 싫어도 다음과 같은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을 어떻게 제재할 것인가? 미국 정부와 시민들이 만족할 만한 책임소재 및 배후세력 색출과 적절한 처벌 수준은 무엇이며, 이것을 우리 정부가 얼마만큼 수행해야 하는가? 북한이나 자국민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처가 미국에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한·미공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러한 각종 부담이야말로 김씨가 야기하고 싶었던 문제이며 이를 미국 정부는 피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피습 사건을 확대 해석하는 정부나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는 검찰이나 이를 ‘종북’에 의한 정치적 테러로 규정하려는 정치권이나 피 흘리는 리퍼트 대사의 모습을 반복해서 틀어주고 있는 언론이나 모두 큰 그림을 놓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잊힌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발언 문제나 사드 미사일 배치와 관련된 대미협상 등 양국 사이에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외교적 사안들은 무겁고도 무수하다. ‘국익’이 그렇게 중차대한 고려사항이라면 한·미동맹의 공고성을 입증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양보와 지지 않아도 될 부담을, 미국은 오히려 사양하는데 스스로 나서서 떠맡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따름이다.

서울 한복판 ‘민족화해협력’을 위한 자리에서 우방의 대사가 따뜻한 아침을 먹다가 칼에 찔렸다는 놀라움과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북한 정부가 이를 의거로 규정한 소아병적 지질함. 부채춤으로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우리의 친절함과 ‘종북’으로 덧씌워진 서슬 퍼런 진영론의 복잡한 공존. 그러나 이 혼돈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은 어떤 종류의 정치적 목적도 폭력을 통해서는 달성될 수 없고 달성되어서도 안된다는 현대정치적 공리에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나 재삼 공감한다는 매우 평범한 사실이었다. 대사의 회복과 함께 우리 정치토론의 쾌유를 빈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