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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리네요.”

계면쩍은 헛웃음에 이어 곧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상엽씨가 울컥함을 참는 게 분명했다. 아내 박옥순(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총장)이 장애인권운동을 하다가 물게 된 벌금 대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잘한 결정이라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아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정의롭고 옳은 선택이었기에 늘 지지하고 존중하고 존경하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쉰다섯 살의 아내는 32년간의 장애인권 운동 탓인지 몸이 부실했다. 5년 전 생긴 신진대사 질환 때문에 힘들면 온몸이 붓고 심하면 눈까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찜통더위에 구치소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한 달 이상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결국 지난 17일 오전, 옥순씨는 검찰에 출두했다. “정의롭지 못한 재판 결과를 이행하느니 차라리 노역으로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싶다. 이렇게 해서라도 장애인들이 왜 법률을 뛰어넘는 투쟁을 해야 하는지 알리고 싶다”는 요지의 편지를 주위에 남기고서였다. 옥순씨는 함께 노역을 자청한 두 장애인 활동가와 함께 이날 저녁 7시쯤 서울구치소에 이감됐다.

옥순씨가 벌금을 물게 된 사연은 이랬다. 3년 전 장애인 고 송국현씨가 혼자서 살다 원인 모를 화재를 당했다. 침대에서 현관까지는 불과 다섯 걸음. 옆에 누군가가 손만 잡아줬어도 화마를 피할 수 있었을 그 지척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송씨는 결국 명을 달리했다.

그때 옥순씨는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 달려갔다. 화재가 나기 일주일 전, 장애 3급이었던 송씨가 공단을 두 차례나 찾아가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활동보조인을 지원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옥순씨는 공단 이사장을 만나 송씨를 살려내라고, 장애인 등급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린 것은 건물 앞을 철통처럼 에워싼 경찰뿐. 급기야 몸싸움이 벌어졌고 경찰은 그녀를 고발했다. 이후 300만원짜리 벌금 고지서가 그녀에게 날아왔다.

작고 바짝 마른 체격의 옥순씨는 만나서 10분만 얘기해 보면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다. 장애인도 고속버스를 탈 수 있게 해달라고, 장애인도 인권유린이 일상화된 수용시설을 벗어나 자유를 맛보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는 현장에서 그녀를 지켜봤던 나는 사석에서 만난 그녀가 주변을 유쾌한 웃음바다로 만드는 특유의 끼와 흥이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그런 그녀가 왜 걸핏하면 도로를 점거하고 심하면 삭발과 단식도 불사할까? “정부에 우리 요구를 말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해서 한 번에 만나본 적이 없었다”는 게 그녀의 항변이다. 누군들 큰소리를 지르고 주변의 눈살을 감내하고, 경찰에 끌려가기가 다반사인 삶을 살고 싶겠는가. 소리치지 않아도, 불법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소통한다면 누가 그런 일을 자임할까.

2000년대 이후 장애인권운동은 이동권 확보, 차별금지법 제정,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장애등급제 및 부양의무제 폐지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벌금과 형사처벌의 제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수의 활동가들이 구속되기도 하고 무거운 형을 살았다. 수천만원의 벌금 또한 장애인권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었다. 매년 수천만원씩 부과되는 벌금을 감당할 길이 없어 지난 몇 년간 장애인 활동가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번갈아 가며 구치소 노역을 감당하고 후원금을 모았다.

옥순씨와 그 동료들이 지금 당장 감당해야 할 벌금은 2400만원이라고 한다. 지난해 부과된 1000여만원의 벌금은 겨우 갚았다. 최저임금 수준으로 살아가는 단체 활동가들의 쥐꼬리만 한 활동비를 쪼개고 급기야는 사무실 임대료를 털어서였다. 대신 불광동 민주노총 본부 앞과 서울혁신파크 앞을 전전하며 천막을 치고 지난겨울을 버텨왔다.

촛불혁명으로 새 시대가 왔다고, 문재인 정부의 쾌도난마 같은 개혁이 국민에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선사한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현장에서 그들의 손을 내밀어 주지는 못할망정 철통 같은 방어와 도로점거 등을 빌미로 부과된 벌금의 위력은 정권이 바뀌어도 어김없이 작동되고 있다. 돈 없는 단체의 약점을 잡아 벌금으로 정당한 시민활동을 억압하는 제도는 적폐청산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옥순씨를 검찰 앞까지 바래다준 상엽씨는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노역이 끝나면 구치소가 아닌 집에서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을 지지합니다.” 새 시대를 비추는 촛불이라면, 상엽씨 부부의 소박한 식탁도 따뜻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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