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진보적 의제들을 선점했다.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를 위한 경제민주화 공약이 대표적 사례였다. 복지의제였던 기초연금 공약은 진보세력의 보편적 복지담론을 닮은 듯했다. 외교·안보분야에서도 북한에 대한 화해협력정책과 강압정책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제시했다. 전임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한 셈이다. 동시에 선거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서해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는가를 쟁점화했다. 안과 밖에 적을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체계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냉전적 보수세력을 호명하며 정책적 좌회전을 시도하는 의제설정의 정치를 통해 지지기반을 확장하고자 했고, 결국 박근혜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선거과정에서의 의제설정을 진정성의 소산으로, 의제설정과 선거결과를 신뢰의 표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의제들을 정책으로 만들고 실천할 수 있는 박근혜 정부의 실력, 보수의 실력을 기대했다. 경제민주화와 한반도 평화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대적 소명이고, 그 둘이 새 성장동력이라는 전환적 사고도 그 기대에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장악한 주체들은 재선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5년 단임제하에서 선거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정치연합을 지속·확대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부의 지지율만 유지된다면, 선거과정의 의제를 정책화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권력은 의제의 생략, 의제의 전환, 정책 없는 의제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야당과 시민사회가 비판과 견제를 하지 못할 때, 권력의 그 기능은 극대화된다.
경제민주화가 의제에서 사라졌다. 국가 및 개인의 부채를 증가시켜 성장을 이루려는 사실상의 부채주도 성장론이 경제민주화를 대체했다. OECD 기준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이 최하위권이고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최상위권인 한국에서 성장제일주의가 적절한 대안인지 의문이다. 기초연금 공약을 수정하고 정책화한 이후, 복지의제는 증세 논란과 결합되어 진퇴를 반복하고 있다. 증세 없이 성장을 통해 세수를 증대해 복지에 투자하겠다는 의제전환은, 증세가 정권의 지지기반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의 산물일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집권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집권 2년차를 지날 즈음 지배연합 내부에도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외교·안보분야에서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론을 연상시키는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의제로만 남아 있다. 남북협력을 금지한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와 박근혜 정부 출범 무렵 3차 핵실험과 핵보유의 영구화를 토대로 한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제약하는 대내외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남북협력을 재가동하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해법은 박근혜 정부의 의제가 아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제고하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의제임에도, 여전히 실종 상태다. 공약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재연기하고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한에 대해 맞춤형 억제전략을 추진할 때,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딜레마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 조건하에서, 기능주의적으로 설계된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기능하지 않게 된다. 간헐적으로 개최된 남북대화에서도 서로의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도구적, 전략적 신뢰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2014년 벽두에 등장한 통일대박론은, 정책 없는 의제지속의 한 표현이었다. 갈등의 전환이 갈등하는 타자를 인정하고 서로 미래의 기억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고 한다면, 통일대박론은 그 길을 벗어난 우리 내부의 담론이다. 통일대박론은 통일 의제를 보수가 재점유하는 효과는 발휘하고 있다. 통일이라는 의제 그 자체는 물론 통일의 내용과 형태, 주체와 방법이 공유되지 않은 채, 단계를 넘어 제시된 통일대박론은, 대박론의 대박만을 낳고 있다.
정부혁신 업무보고, 국민의례하는 박 대통령 (출처 : 경향DB)
박근혜 정부 2년은, 선거과정에서의 의제설정과 그에 기초하여 구성된 정치연합에서 이탈하는 기간이었다. 성장과 안보를 절대화하는 냉전적 보수로 회귀할 때, 불통은 필연적이다. 박근혜 정부의 진정성과 실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했던 지지율도 위험의 임계치를 넘고 있다. 정권의 위기다. 비극은, 정권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로 비화시킬 수도 있는, 한국정치의 현재다.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박근혜 복지 공약’ 폐기·축소는 국민 배신 아닌가 (0) | 2015.02.09 |
---|---|
[사설]국립대 총장까지 ‘친박’ 정치인이라니 (0) | 2015.02.09 |
[기고]박근혜 정권의 두 번째 벌금형을 때려 맞고 (0) | 2015.02.08 |
[사설]‘문재인호’ 출범, 야당 혁신의 마지막 기회다 (0) | 2015.02.08 |
[사설]언론사 외압, 투기 의혹… 이완구, 총리 자격 있나 (0) | 2015.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