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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의 새 인사들 중 한 명이 ‘교수 시절의 처신’ ‘시중에 도는 구설’로 내부적 검증대상이 되고 자진하차했다는 뉴스가 며칠 전에 있었다. 그런데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이 아니고 국가안보실 2차장이었다.

탁현민씨의 어이없는 책 <남자 마음 설명서> 전체를 상세히 논의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원한다면 콘돔을 선택하고, 열정적이고 화끈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면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는 구절에 대해선 이야기를 해야겠다. 안전한 섹스와 “열정적인” 섹스를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못 박고 섹스를 이 양자택일로 환원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통념이며,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해악은 심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여자들에게 원치 않는 임신만큼 두려운 것은 없고, 원치 않는 임신, 감염을 걱정해야 하는 섹스처럼 괴로운 것도 없다. 처방전이 필요한 사후피임약 복용에서 질병검사, 인공임신중절시술, 혹은 임신, 출산, 사회적 낙인과 수치심까지, 남자의 사후적 책임분담과 상관없이 여자가 애당초 동의하지 않았던 엄청난 육체적, 심리적, 경제적 부담과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화끈한 분위기”를 위해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인가? “콘돔 사용은” (무엇인지 모를)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식의 발상이 권하는 섹스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폭력과 맞닿아 있다.
 
내가 일하는 학교의 여자화장실에 한동안 낙서판이 붙어있었다. 여학생들이 달리 털어놓을 곳이 없는 고민을 거기 토로하기도 했는데, 성관계에 대한 걱정들이 많았다. 매일 먹어야 하는 경구피임약이 부담스러운데 남자친구가 콘돔 사용을 기피한다는 하소연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난 그걸 볼 때마다, 여자친구가 원하는 피임에 협조하지 않는 남자친구와는 헤어지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써두곤 했다. 그 낙서판은 없어졌지만 지금은 학교마다 익명으로 소통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있다. 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간혹 들여다보자면, 섹스와 피임에 관한 고민들은 여전하다. ‘싸튀충’으로 인한 심각한 피해사례들도 본 적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사용하는 속어 ‘싸튀충’은 합의되지 않은 체내 사정을 하고 나몰라라 하는 남자를 가리킨다. 이 말이 어떤 분노에서 생겨났는지는 명백하다. 상대의 안위와 관계의 지속가능성보다 당장 자신의 쾌락을 우위에 두는 남자에 대한 분노는 그의 행위가 유발하는 공포, 고통에 비례한다. 불편한 어감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런 속어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어떤 남자에게 “열정적이고 화끈한” 섹스가 여자에겐 너무나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점, 그런 행위가 따로 통용되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발생빈도가 높은 현상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위키리크스의 창시자로 유명해진 줄리언 어산지가 몇 해 동안 런던의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숨어 지낸 이유는 성폭행 혐의에 대한 스웨덴 당국의 기소 때문이었다. 그의 성폭행 혐의 내용은 흔히 생각하는 강간, 동의 없는 삽입과는 좀 다르다. 내가 그 사건에서 주목했던 것은 상대의 콘돔 사용 요구에 동의한 후 섹스 중에 고의로 콘돔을 파손하고 체내 사정을 하는 경우, 또 상대가 콘돔 사용을 요구하며 섹스에 동의한 상황에서 임의로 콘돔 없이 삽입하는 경우가 모두 성폭행 구성 요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유롭게 섹스를 할 권리 외에도 섹스를 하지 않을 권리, 원하는 방식으로 섹스를 하도록 파트너와 합의할 권리, 그리고 특히 여자에게는 자기 몸에 가장 안전하고 적합한 방식으로 피임할 권리를 포함한다. 섹스를 자신의 쾌락 중심으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상대의 권리를 침해하는 성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탁씨의 책은 여자를 신체부위로 분절하고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정도에 따라 분류한 여성혐오적 내용도 문제지만, 그런 여성혐오 및 섹스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을 남자마음에 대한 설명서라고 내놓았다는 점에서 남성 일반 역시 모독하는 책이다. 그러니 분개해야 하는 건 남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성근씨는 최근 트위터에서 “그가 흔들리지 않고 잘 활동하도록 응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려에도 불구하고 8일 청와대는 “임명을 철회할 뜻은 없다”고 밝혔다.
 
성평등을 표방하는 정부가 지향해야 할 성·젠더 감수성에 이처럼 전혀 맞지 않는 가치관을 자신의 문화콘텐츠로 마케팅했던 인사가 청와대 보좌진에 포함된 건 난감하다. 문재인 정부와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건승을 바라는 나로선 지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젠 가치관이 다르다며 소셜미디어로 사과를 했으니 괜찮은가?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형식적인 사과는 정유라도 했는데 말이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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