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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등군사법원에서 해군의 여성 성소수자 부하 군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 대하여 잇단 무죄판결이 나옴에 따라 성폭력에 관한 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인 ㄱ중위와 피고인인 ㄴ소령 간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되나 폭력이나 협박 등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하였다. ㄴ소령은 함정과 함정 바깥에서 아홉 차례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고 이 결과 피해자인 중위는 인공임신중절 수술까지 해야 했다. 이후 ㄱ중위는 또 다른 상관인 ㄷ중령에게 중절수술을 보고하면서 성폭력 사실을 털어놓자 ㄷ중령이 ㄱ중위를 재차 성폭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고등군사법원은 군형법의 ‘강간치상’ 등에 대한 유죄선고를 내렸던 원심을 파기하고 ㄴ소령과 ㄷ중령 양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선고를 하였다.
이 사건에는 고립된 상황 속에서 여성군인 그리고 성소수자 군인의 처우, 성폭력 이후 2차 가해 등 여러 이슈들이 얽혀있지만, 여기서는 강간죄의 ‘폭행과 협박’ 요건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요건은 오랫동안 한국의 법원에서 강간뿐 아니라 다양한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알파요 오메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형법 제297조 강간죄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문은 2012년 12월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개정한 것 이외에는 1953년 9월 제정된 형법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본 조문에 대해서 여러 비판이 있었는데, 특히 강간의 수단인 폭행과 협박이 ‘최협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에 관해서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에 따라 법원의 실무에서 최협의의 폭행·협박기준은 거의 사라졌다고 듣고 있지만, 이번 해군 성폭력 판결에서 볼 때, 이 기준은 유령처럼 한국의 법원을 아직도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최협의의 폭행·협박이란 ‘상대방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폭행·협박이 사용되지 않은 성폭력은 형법상 강간에 해당하지 않게 되고, Ⅱ)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고 최협의 정도에 이르지 않는 폭행·협박이 사용된 성폭력도 강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Ⅲ) 상대방의 의사에 반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런 폭행·협박에 대해 피해자의 저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폭행·협박의 정도가 저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것이므로 피해자가 저항에 성공한다는 것은 확률상 희박할뿐더러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위험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먼저 피해자의 반항은 더 높은 정도의 폭력을 가져올 것이다. 가해자가 반항을 현저히 곤란케 하는 폭력을 사용할 때, 피해자가 저항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 시도 앞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렸는가. 둘째, 이러한 태도는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한다는 점과도 크게 괴리된다. 보호법익이란 어떤 범죄행위에 의해 훼손되는 가치 또는 이익을 말한다. 고강도의 폭행·협박에 대해 극도의 저항을 전제로 하는 최협의의 폭행·협박설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여성의 정조가 목숨보다 중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미 1970년대 미국법원은 극도의 저항(utmost resistance) 요건을 폐기하고, 가해자의 명시적인 폭력이나 폭력의 암시, 피해자의 공포 등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최근에는 강간죄 성립을 부정하려면 확정적 동의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하는 추세이다. 셋째, 한국에서 대다수의 성폭력은 아는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진다. 이런 성폭력을 최협의의 폭행·협박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대단치도 않은 무력에 대해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고 그것은 내심 그 관계에 동의했다는 걸 의미하기에 성폭력 판단은커녕 피해 여성들이 의심받고 심지어 비난받기 십상이다. 이러한 법의 시선은 그녀들의 인격과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사회에서도’ 그녀들의 이런 의사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성문화를 조장할 것이다. 이러할 때,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이란 위축되고 비틀린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아가 ‘미투(MeToo)’ 국면이 보여주듯 회사나 학교, 군대 등에서 행사되는 ‘힘’은 물리적 폭력과 함께 사회적인 폭력을 뜻한다. 이에 물리적인 폭력을 성폭력 판단의 금과옥조로 여긴다면 사회적 힘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법의 논리가 크게 뒤처지게 될 것이다.
성폭력 범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할 때, 그 알파요 오메가는 ‘진솔한 Yes’가 될 수 있도록 법이 유도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형법 제32장의 전면적 개정과 이에 따른 성폭력 판단기준의 재구성이라는 오래된 과제가 남아있다. 성폭력 판단의 법과 사회는 그 시계를 1950년대가 아니라 오늘에 맞추어야 한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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