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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전파자’라는 단어가 나는 불편하다. 메르스 확산에 대한 정부 당국의 책임을 은연중에 가리면서 특별히 엄청난 전염력을 지닌 환자 ‘개인’을 주목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번째 환자’가 슈퍼전파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사실 개인에게 있지 않다. 평택성모병원의 경우 병실료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병실을 쪼개면서 환기시설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메르스 확산이 일어났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메르스 환자일 가능성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던 기회를 병원 측이 놓친 것에다 응급실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침대, 그리고 정부의 초동 대응 부실이 슈퍼전파를 빚어냈다. ‘슈퍼전파’는 이처럼 병원의 취약한 방역구조와 정부의 초동 대응 실패가 만들어낸 ‘사회적 피해’이다. 슈퍼전파자는 정부의 비밀주의와 병원의 부실한 감염관리 체계가 만들어낸 피해자일 뿐이다.

실상은 피해자인데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는 일은 주로 국가나 기업 등 ‘권력’ 집단이 사회적 재난을 유발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재난을 확산시킨 데 책임이 있는 경우에 종종 목격되는 현상이다. 가해자로서 권력의 책임을 은폐하거나 축소시키기 위한 일종의 프레임 전환이다. 멀리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나 제주 4·3사건과 같은 적나라한 국가폭력 사건에서도 그러했고,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에서도 그런 프레임 전환을 볼 수 있다.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처음엔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무능과 구조 실패가 겹쳐지면서 사회적 재앙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피해자는 피해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 “카트리나의 피해자는 골칫거리나 괴물로 간주되었고 당국의 대응 방침이 구조에서 통제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더 심한 대응도 있었다. 시 당국에 이어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피해자들을 범죄자로 간주하고 뉴올리언스를 감옥도시로 만들어버린”(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351쪽) 참사가 되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프레임 전환은 대개 진짜 가해자의 책임을 은폐하려는 정치적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술이 사용된다.

첫째는 ‘오명 씌우기’. 피해자의 약점을 캐서 그것을 부각시키는 전술이다. 불순한 성향이나 의도를 지닌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든다. ‘배·보상 많이 받으려고 거리로 나온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이미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꼭 불순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해자로서의 경솔한 행동’을 탓하기도 한다. 이 전술은 피해자의 자격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해자의 말이 갖는 사회적 성찰의 계기를 박탈해버린다.

둘째는 ‘사회질서를 해치는 사람’이라는 올가미이다. 국가나 자본 같은 권력은 사회적 재난에 직간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종종 경찰력과 같은 진압적 통제수단을 동원하여 피해자의 목소리와 주장을 억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권력과 맞서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인데, 권력의 무능함과 정책 실패 그리고 책임회피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사회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역전의 프레임’은 그래서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사악한 권력장치이다. 그것은 진짜 가해자로서 권력집단의 책임을 은폐하거나 희석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메르스 사태를 키운 건 슈퍼전파자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병문안 문화나 가족간병 문화를 탓할 것도 아니다. 감염전파의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충분히 격리보호하는 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구조화된 병원의 책임을 말해야 한다. 환자의 간호를 병원이 책임지지 않는 의료체계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안전보다 병원의 이익에 행여나 해가 될까를 노심초사하면서 병원 정보 공개를 미룬 국가의 책임을 짚어야 한다.

1-4차 감염자들과 예의주시하는 병원 슈퍼전파자 후보군 (출처 : 경향DB)


3년 전부터 메르스의 국내 유입 가능성에 대해 경고가 있었지만, 국가는 메르스의 국내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초기 대응에서도 국가는 대형병원의 이익을 보살피느라 완전히 실패하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세월호의 안전성에 대한 경고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어느 정부기관도 규제하지 않았고 국가권력은 침몰 초기의 구조에서도 완전히 실패하였다.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은 진짜 가해자의 책임이 온전하게 밝혀질 때이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낙인찍는 프레임이 작동을 멈추고 권력집단의 책임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존재하는 사회가 진짜 민주사회이다.


이호중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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