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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19년에 우리 민족이 거국적으로 독립과 자유를 외친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매년 맞는 3·1절이지만 금년에는 외국인으로 3·1운동의 기록관과 홍보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가 유난히 그립다. 박사는 탑골공원과 서울시청의 만세운동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우리 민족의 독립 열기를 전 세계에 알렸던 분이다. 또한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음에도 화성시 제암리와 수촌리에 있는 일제의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 전 세계에 알렸다. 더군다나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내한해 1970년 소천할 때까지 머물며 한국의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싸웠고, 많은 고학생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멘토 역할을 했다. 나도 10대 때 스코필드 박사의 재정 지원과 정신적 지도를 받고 성장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수)의학자요, 대한민국 독립의 은인으로 ‘푸른 눈을 가진 34번째 민족대표’인 스코필드 박사. 약자에 대한 헌신, 박애 정신, 불의에 호랑이처럼 대항하는 정의감이 삶의 원칙이었다. 그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에도 이런 원칙이 담겨 있다. ‘돌 같은 굳은 의지와 호랑이 같은 강한 기개로 불의에 저항하고 타인에게는 약(pill)과 같이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라’라는 뜻이다. 박사의 이런 삶의 철학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만나, 그가 강조한 ‘3·1정신’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1919년 만세 현장에서 독립을 외친 한국인들의 눈에서 한국 사회의 희망과 기개를 보았고, 그 당시 선진들이 흘린 땀과 희생을 청년세대가 결코 잊지 말자고 죽을 때까지 외치셨다. 70이 넘은 나이에 한국 사회 독재와 부패와의 싸움 근저에도 자유와 독립과 정의에 기초한 3·1정신이 가장 요긴하다고 믿었다. 특히 ‘3·1회관’을 지어 한국민들의 얼과 정신을 연구하고 가르칠 공간을 만들 것을 몇 번이나 제안하셨다.

자신의 고국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한국인을 사랑한 내 은사의 염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진하게 남는 아침이다. 같은 캐나다 출신으로 스코필드보다 1년 뒤에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했던 종군 의사 노먼 베순(1890~1939)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토론토에서 교육받은 흉부외과 의사 베순은 스페인 내전의 종군의사로, 중국에선 마오쩌둥이 이끄는 팔로군의 전쟁터에서 중국군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스코필드처럼 정의감과 인류에 대한 박애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베순은 수혈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 군인들을 설득해 민군합동 헌혈부대를 만들고, 당시 생소했던 야전병원과 의료차량을 만든 보건의료 전문가였다. 그는 중국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병사들까지 치료한 ‘이념과 지역을 초월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중국인들은 그를 ‘파란 눈을 가진 바이추언(白求恩, 백구은)’, 즉 사람을 구하고(求) 중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푼(恩) 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밤에는 의료 서적을 집필하고 낮에는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순은 1939년 11월 맨손으로 수술을 하다 생긴 상처가 패혈증으로 발전해 사망했고, 중국의 순교자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기에서 베순을 중국인을 위해 가장 헌신한 외국인이라 칭하고, 중국의 수많은 학교에 동상을 세웠으며 학생들이 베순의 인류애와 중국인 사랑을 배우게 했다. 중국의 CCTV는 ‘바이추언’ 드라마를 거듭 제작해 방송해 왔고, 베순의 전기와 연구서는 중국어뿐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로도 출판되어 세계인들이 읽고 있다. 심지어 토론토 북쪽에 위치한 그레이븐허스트에 자리한 그의 생가에 지어진 베순박물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중국인이 방문해 베순에 대한 변함없는 감사를 표하고 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노먼 베순의 삶과 업적도 중요하지만, 사실 약소민족 한국인들을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의 활동은 그보다 훨씬 빼어났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감동적이다. 베순이 중국에서 활동했던 최고의 서양인이었다면, 스코필드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최초로 유일하게 안장된 서양사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스코필드 박사를 포함한 외국인들의 헌신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감사하지도, 기념하지도 못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이 이제라도 그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차원에서 스코필드 박사를 기념할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민족이 3·1정신과 가치를 되살렸으면 한다. 박사는 3·1운동이 ‘한국정신의 상징’이라 말하며, 희생과 자유와 정의의 정신이 한국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평생 역설했다. 자유와 독립을 외친 3·1만세운동이 대한민국의 근간이 된 임시정부를 태동시켰듯이, 3·1정신이 한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둘째, 이러한 3·1정신을 교육하고 발전시킬 가칭 ‘3·1회관’이 건립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3·1정신을 국내외적으로 연구하고, 21세기를 살아나갈 우리 민족의 저력과 기본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셋째, 서울 시내나 박사가 직접 찾아 위로하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 제암리 쪽에 스코필드를 기리는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라도 마련했으면 한다. 도서관과 박물관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듯이, 이제는 우리도 선진들을 기념할 공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때로 분주한 삶에 함몰되어 과거 우리 선진들과 위인들을 기념하고, 유산의 힘으로 발전시키는 데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행히 이번 3·1운동 100주년과 그 직접적인 결과물인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관과 민과 종교계와 일반사회를 통해 많은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점은 무척 고무적이다. 이런 노력이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밀려올 거대한 파도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민족이 3·1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고 실천에 옮길 때 3·1정신이 장차 통일 한반도에도 든든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오늘 따라 ‘약자들에게는 비둘기 같고,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와 같았던 내 은사 스코필드 박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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