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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표팀이 12일과 15일 브라질과 말리를 상대로 평가전을 치른다. 이를 위해 기성용 선수가 입국했다. 그러나 먼저 “최강희 감독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진작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를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볼 때 스물네 살이라면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과를 하는 일의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독자들 중에는 기성용보다 훨씬 연륜이 있음에도 ‘타이밍’을 놓친 바람에 평생 후회되는 일을 겪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번 타이밍을 놓치면 그 어떤 묘법을 써도 구차한 변명이 되거나 불필요한 오해만 낳게 된다. 마음은 검게 타들어가도 차라리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며 차일피일 미룬 경험, 누구나 겪어 본 일이다.


물론 지난 7월 불거진 ‘SNS 파문’은 일차적으로 기성용에게 책임이 있다. 근거와 절차가 구비된 하소연이나 비판이 아니라 조롱과 비난이었다. ‘해외파’ 운운한 것은 스타의식이나 파벌의식 같은 조짐으로도 보였다. 그래서인지 입국장의 기성용은 시종 어두웠다. 나는, 기성용 선수가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한 선수가 모든 비난과 멍에를 뒤집어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의심스럽다.


홍명보 국가대표 감독(왼쪽)과 기성용 선수(출처 : 경향DB)


최강희 감독을 비롯한 당시의 대다수 코치진과 선수들이 그 흔한 표현대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잘 굴러가던 대표팀이었는데 ‘선후배 위계 질서’도 모르는 기성용이라는 평지돌출의 철부지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일’이었는가. 혹시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성적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따라서 브라질행 본선 티켓도 겨우 따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팀 전체의 모순과 문제점이 기성용 선수의 경솔한 ‘SNS 문구’라는 ‘약한 고리’를 통해 터져버린 것이 아닌가. 


그 과정에서 기성용을 코칭스태프가 제대로 이끌거나 제어했는가. 선수가 팀 전체 분위기나 감독의 지도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면 감독 또한 팀 상황을 완전히 숙지하고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 나는 이제 와서 이런 모든 질문이 재론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브라질행 티켓을 따낸 최강희 감독은 정신적 고향이랄 수 있는 전북 현대로 돌아가 다시금 K-리그 최고 수준의 팀으로 이끌고 있다. 대표팀도 홍명보 감독이 새로 부임하며 벌써 여러 차례 중요 경기를 소화한 다음이다. 기성용 선수도 새로 바뀐 팀에서 주전 경쟁에 몰입하는 중이다.


최강희 감독.(출처 : 경향DB)


말하자면 판이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기성용 ‘사과’ 및 그것의 진정성 문제가 재론되는 것은 아슬아슬하다. 이미 이심전심으로 확인된 것을 ‘위계질서’ 차원에서 정리하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된다면 이는 너무 위험하다. 만약 이를 재론하고자 한다면 기성용을 포함한 관계자 전원의 ‘신앙 고백’ 수준의 말들이 필요한데,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다. 1970년대의 어느 고등학교 교실을 무대로 하는 이 소설의 빛나는 가치는, 소설 속 상황이 다양한 가치와 욕망이 교집하는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묘파해낸다는 것이다. 나는 이천수 파동을 비롯해 스포츠계에서 벌어진 여러 ‘윤리적’인 문제를 검토할 때마다 이 소설을 거듭 인용했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학교에 ‘문제아’가 있고 열정적인 교사가 있다. 이 교사의 인생 목표는 학생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가르친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뿐만 아니라 처지는 학생들도 열성으로 가르친다. 집에까지 데려가서 밤늦도록 가르친다. 누구도 그의 열성과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기표가 문제다. 기표는 이러한 학급 분위기를 망치는 학생이다. 최고의 진학률을 자랑하는 학급인데 기표 때문에 위기가 닥친다. 그래서 선의와 열성을 가진 교사와 우등생들이 기표를 돕기 시작한다. 중요한 시험 때는 몰래 답안지를 돌리기까지 한다. 어느덧 기표는 ‘착한 학생’이 된다. 방송국에서 찾아올 정도로 전국적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기표는 결국 선한 자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제 갈 길을 간다. 기표는 ‘착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학교를 도망친다. 그가 남긴 쪽지에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다. ‘선의’ 자체가 누구나 만족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유일무이한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홍명보 감독은 고심 끝에 현재의 상황을 수습하고 극복할 ‘중재자’가 되어 최강희 감독과 기성용 선수의 만남을 갖고자 했다. 그 충정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최강희 감독은 기성용 선수가 사과하러 올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다. 다 지난 일이니 경기장에서 실력으로 보답하라고 했다. 그 와중에 기성용은 입국장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자, 여기까지다.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세 사람이 복잡한 갈등 상황에서 저마다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게 되면 ‘우상의 눈물’이 될 수 있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마음의 병은 세월이 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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