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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강의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대전의 라디오 채널이 잡혔다. 서울에 있었더라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를 그때 들었다. 시민구단 대전시티즌이 2부 리그에서 우승했고 그에 따라 내년 시즌을 1부 리그에서 뛰게 되었는데, 이에 김세환 사장이 출연해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고난의 행군을 했는지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정치인에 가까웠다. 매끈한 문장에 기름칠을 한 거침없는 달변이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역시나 지역 정치계에서 활동해온 인물이었다. 달변 속에 한 움큼의 진지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련되었으되 대단히 공세적인 발언은, 불안하게 느껴졌다. 정치적 풍향에 따라 휘둘리는 시민구단의 운명 말이다.

K리그에 시민구단이 있다. 주로 지자체가 관장하는 시민구단의 역사는 2003년 대구FC를 필두로 하여 인천유나이티드, 경남FC, 강원FC, 광주FC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통일그룹이 손을 떼면서 시민구단으로 변모한 성남FC도 있다. 시민구단의 현실은 대체로 불안하다. 지역 정치의 역학관계에 의해 팀 분위기가 여지없이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대전시티즌의 절치부심은 값진 것이었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선수와 감독이 땀을 흘렸고 바깥에서는 김 사장이 공격적인 경영을 밀어붙였다. 그는 염홍철 전 대전시장의 캠프 출신이다. 그래서 1년 전 부임할 때 ‘낙하산’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는 “축구는 모른다. 조진호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경영을 하러 왔다”며 경영 정상화에 매진했다. 일정한 성과를 냈다.

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성과가 대전의 장기적 안정화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문하고 싶다. 현재 대전은 살얼음판 위에 있다. 재정이 확실하게 안정된 것도 아니고 1부 리그의 강팀에 비해 선수층도 얇다. 무엇보다 김 사장의 임기가 내년 2월로 끝난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 따라 새 구단주가 된 권선택 시장은 염 전 시장 사람으로 분류되는 김 사장을 당장 흔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부 리그 승격에도 불구하고 “인사 문제는 별개”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물고 물리는 구단 정치의 단면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대대적인 구단 인사가 발생하고 따라서 모두들 축구를 생각하기보다는 구단주, 즉 지역 정치의 승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입만 바라보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특히 대전이 그랬다. 그 곪아터진 상처가 덧날 기미가 보인다.


▲ 지자체장 선거 결과 따라
구단의 운명 부침 반복…
축구는 정치인 전리품 아닌
지역 주민들 위해 존재해야


대전만이 아니다. 지난 7일, 광주FC도 경남FC를 누르고 1부 리그로 승격했다. 구단주인 윤장현 광주시장은 경남FC와의 원정에서 1부 리그 승격이 확정되자 축하 전문을 보냈다. 그럼에도 당장 내년 살림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현재 확보된 예산은 2부 리그를 근근이 운영하는 정도인 25억원 남짓. 차라리 2부 리그에 잔존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윤 시장도 “광주FC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한다. 1부 리그 승격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태, 그게 프로축구의 현실이다.

당장 경남FC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다. 광주FC에 패하면서 2부 리그 강등이 확정되자 축구계는 팀이 해체되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구단주인 홍준표 도지사가 “2부 리그로 강등되면 후원도 없어지고 더 이상 팀을 운영할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한 의도라고는 하지만, 충격적인 선언을 여지없이 현실화해 버리는 스타일 때문에 축구계는 불안해하고 있다.

성남FC도 불안하다. FA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구단주인 이재명 시장이 심판 판정과 관련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에 연맹은 지난 5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가장 약한 수위인 경고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 시장은 “경고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재심 청구는 물론 법정 투쟁을 통해 반드시 연맹의 잘못을 입증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시장과 같은 입장에서 홍 지사도 연맹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장만 징계를 받았다. 이에 이 시장은 홍 지사에게 “K리그와 경남FC를 위해 연맹에 징계 자청”을 하라고 주문했고 홍 지사는 “나를 징계 안 한다고 물고들어가는 저열한 행태”라고 비난했다. 홍 지사의 글이 거칠고 단순하면서도 속내를 여지없이 밝힌 것에 비해 이 시장의 글은 정교하고 매끄럽다. 근사한 수사학으로 상대방의 혈맥을 움켜쥐려는 의도까지 엿보인다. “연맹이 진짜 지사님을 징계해서 ‘부조리한 연맹의 탄압을 받는 시·도민 구단 해산’이라는 명분, 즉 의외의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는 표현이 그렇다. 반면 홍 지사는 특유의 스타일대로 거침이 없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상종하기 힘든 저열한 분’이라는 말까지 썼다.

이렇게까지 난타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시민구단의 운명이 구단주의 스타일에 달려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걸 입증한다. 축구는 정치인들의 전리품이 아니다. 그러나 시민구단은 그들의 손바닥에 놓인 공깃돌이다. 말싸움과 기싸움이 벌어지면 스타일의 정치가 펼쳐진다. 스타일의 정치는 누가 여론을 압도하느냐가 관건이다. 말이 더욱 거칠어지고 괴이해진다. 이렇게 되면 축구는 실종된다. 경영 정상화나 합리적 운영 같은 사안은 사라지고 정치인들의 압박 축구만이 펼쳐지는 양상, 그 점이 우려된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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