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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협회가 지난 11월22일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창립 80주년의 일환으로 지금 선 자리에서 앞으로 지향해야 할 자리를 살핀 행사다. 이를 위해 축구협회 미래기획단이 ‘30대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33년까지 ‘꿈꾸고, 즐기고, 나누며’라는 3대 핵심 가치 아래 경쟁력 강화, 인재 육성, 열린 행정 구현, 축구산업 확대, 새로운 문화 조성 등 5대 추진 목표도 밝혔다.


이러한 비전이나 목표는 실천 의지와 현실성이라는 구체적인 힘이 결여되면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일단 의욕적으로 새로 출범한 정몽규 회장 체제와 축구계 안팎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이용수 미래기획단장이라는 조건에서 보면 이 비전과 목표가 탁상 위의 공론이 될 가능성은 비교적 작다. 그럼에도 몇 가지 짚어보고 싶다.


U-20 월드컵 8강 이라크전에 출전한 이광훈이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축구협회가 제시한 창대한 미래 비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최고 수준의 경기력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 안에 진입하고 나아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목표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을 위해 유소년에서 프로 리그에 이르는, 한국 축구의 발전적 피라미드 모델의 안착이 시급하다. 이 구조 없이 특별하게 가려뽑은 대표선수들만의 우승 헹가래는 공허하다.


현재 각각의 연맹이나 축구협회 바깥의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프로, 실업, 생활축구 등을 장차 협회가 컨트롤타워가 되어 모든 리그를 통합 운영한다고 밝혔는데, 이것의 현실화에는 꽤 진통이 따를 것이다. 유일무이한 길이라면 강력한 의지와 소통의 기술이 필요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해법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내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즐기고’와 ‘나누며’이다. 현재 한국 축구는, 대표팀을 제외하고 보면, 즐기거나 나눌 수 있는 형편이 못되며 그런 인식조차 희미한 상황이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중·고교 선수들에게 ‘즐기면서 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선수, 학부모, 지도자 등이 이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즐기는 축구’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직업 선수가 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축구협회가 현실로든 논리로든 입증해야 한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경기에 교체 투입되는 선수에게 부담을 줄여주려고 “즐기면서 해, 괜찮아!” 하고 격려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구조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도저히 ‘즐기면서’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화려한 구호에 불과하다. 선포식 자료에는 그 해법이 단지 선언적이다.


‘나누며’는 오히려 역설의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선포식 자료에는 축구가 지닌 가치를 사회에 전파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쓰여 있다. 나는 오히려 축구계가 사회로부터 더 많이 배우고 흡수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오늘의 사회 상황이 퇴행 징후를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발전하고 있다. 이 발전 속도에 비해 축구의 발전 속도는 더딘 편이다.


우선 우리 사회의 경제 수준에 비해 대다수 축구인들은 힘겹게 살고 있다. 우리 눈에는 유명 스타와 적지 않은 연봉의 지도자들이 보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선수와 지도자들은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다. 해마다 많은 유소년 선수들이 장래의 꿈을 포기하는 실정이다. 협회가 축구산업을 다각도로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일반적 노동조건에 비해 축구계는 아직 뒤처진 상황이다. 예컨대 지금 당장 몇몇 선수들이 ‘선수노조’를 결성한다고 해보자. 당치 않은 소리라는 말부터 나올 것이다. 굳이 이런 수준이 아니라 해도 과연 선수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상황을 개선하거나 의견이라도 낼 수 있는 창구가 있는가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고충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축구계의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는 단위는 거의 없다.


이 사회의 전반적인 상식 수준의 발전에 비해 축구계는 여전히 채워야 할 부분이 많다. ‘공부하는 축구선수’ 같은 긍정적이며 미래적인 계획이 늦게나마 ‘시범’ 실시된 것도 2011년이다. 그 이전까지 축구선수는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의 평균적 상식의 발전과 동떨어져 있었다.


공을 차는 것 말고는 제대로 익힌 것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공을 그만 차게 되었을 때, 선수들과 가족들이 겪는 현실적 고통과 공포는 상당하다. 점점 더 세계가 좁아지면서 앞으로 수많은 선수들이 해외에 나가게 되고 또 그만큼의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문화적, 인종적, 사상적 갈등을 기본적으로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점이 충족되었을 때를 상상하고 싶다. 우리 대표팀이 장차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도 꿈꾸지만 동시에 나는 수많은 선수들이 축구를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는 미래를 꿈꾸고 싶다. 축구를 했다는 것이 공부를 못했다거나 맞으면서 컸다는 식으로 오해되는 게 아니라 성장기를 매우 아름답고 늠름하게 보냈음이 입증되는 미래 말이다.


이영표,"축구즐겼다"(출처 :연합뉴스)


축구를 했기 때문에 다양한 세계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고 때로는 불의에 맞서는 힘도 배웠고 그 어떤 종교, 인종, 사상과도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미래를 나는 꿈꾼다. “아, ‘뽈’ 좀 찼어? 어쩐지 멋있다 했지.” 이런 말을 듣는 미래 말이다. 협회의 자료에는 축구인의 사회적 자존감을 드높이는 실질적인 과제는 거의 빠져 있다. 이 점, 너무 아쉽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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