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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부르크 SV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의 이적설이 불거지고 있다. 여러 차례 러브콜을 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들을 제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만약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게 된다면 그는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지역의 유명한 더비(지역 간 라이벌 경기)에도 출전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독일 근대 산업 혁명의 중추가 되는 유서 깊은 루르 지역의 라이벌 도르트문트와 샬케04의 경기다. 일컬어 레비어 더비라고 부른다.


이 레비어 더비의 한 축인 도르트문트는 1909년에 창단되었다. 이 팀은 히틀러 파시즘 때 큰 수난을 겪었다. 각 지역의 유명 클럽들은 히틀러의 광기에 동참해야 했으나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회장은 나치당 입당을 거부했고 이로써 팀은 해체 직전까지 내몰렸다. 반면 같은 지역의 샬케04는 히틀러 시절, 불운하게도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팀이 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수병들의 적막한 고독과 허망한 죽음을 그린 영화 <특전 U보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라디오로 중계를 듣던 갑판장이 수병들에게 말한다. “나쁜 소식이 하나 있네. 샬케04가 0-5로 패했어. 결승에는 올라가지 못할 것 같군.”


이러한 역사적 ‘오점’에도 불구하고 샬케04는 산업 혁명의 기관이었던 루르 지역의 상징으로 꼽힌다. 샬케04의 팬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노동자계급이었고 선수들 또한 이 팬들의 지역성, 역사성, 계급성의 기반 위에서 공을 찼다. 노동자들이 실업 위기에 몰리거나 그 때문에 파업을 할 경우 선수들 또한 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지닌 도르트문트와 샬케04가 맞붙을 때, 즉 레비어 더비가 열릴 때 가히 전쟁 상태를 방불케 하는 긴장과 충돌이 빚어지고 이 때문에 지역 경찰이 대거 투입되어 불상사 예방에 나서는 모습은 축구가 지닌 또 다른 의외성과 비일상성을 생각하게 한다.


함부르크 손흥민이 마인츠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손흥민의 이적설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우리 선수들이 해외에 진출했을 때, 적어도 그 도시와 해당 팀의 역사와 당대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뛰는 것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천수가 한창 시절에 스페인의 레알 소시에다드로 진출한 바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 진출’했다고 썼지만 바스크 분리독립 운동의 진원지가 되는 도시의 팀을 그저 ‘스페인 전통 클럽’이라고만 써서는 곤란하다. 지동원 선수가 한때 몸담았던 잉글랜드의 선덜랜드도 마찬가지다. 지금 선덜랜드는 신임 디 카니오 감독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다. 디 카니오는 파격적인 공격축구로 침체에 빠진 선덜랜드를 구해내고 있다. 뉴캐슬을 3-0으로 대파하면서 1부 리그 잔류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러나 영국 노동운동의 근거지이며 선수와 팬과 구단 모두가 노동자계급의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선덜랜드로서는 ‘파시스트 경례’ 등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그 자신이 파시스트임을 인정하기도 한, 디 카니오 감독을 한편으로는 씁쓸하게 여기고 있다. 급진 정치학자 랠프 밀리밴드의 아들로 영국 노동당 소속 의원이기도 했던 데이비드 밀리밴드 부회장이 디 카니오의 선임을 비판하며 부회장직을 사퇴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손흥민이나 지동원은 역사학도가 아니라 축구 선수다. 최선의 기량으로 아름다운 골을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팬들의 함성을 얼마든지 독차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왕이면 그 지역의 역사와 해당 클럽의 당대성을 미리 알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그라운드에서 뛰면 더 낫지 않을까. 더욱이 유럽에서 축구가 지닌 엄청난 파괴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지난 런던 올림픽 때의 ‘박종우 독도 세리머니’ 사건 이후 이 같은 역사성의 이해는 더 필요해졌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꽤 많은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한다. 사전에 대한축구협회와 에이전트 회사가 해당 지역과 클럽의 역사를 충분히 알려준다면 해외파 선수들의 현지 적응은 훨씬 빨리, 우호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음으로 대표팀 경기를 뛸 때, 특히 원정경기를 갔을 때, 상대 국가의 문화와 관습을 미리 파악해 놓는다면 예기치 못한 문화적 충돌도 피할 수 있고 더욱이 ‘독도 세리머니’ 같은 일을 막을 수도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박종우에 대한 징계 결정을 내리면서 대한체육회로 하여금 선수들에게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계획을 수립하라는 권고까지 내렸다. 대한체육회나 대한축구협회가 이러한 권고 지시에 따라 얼마나 수준 높은 교육 내용을 만들어 각급 대표팀 경기 전에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지 의문이다.


선수가 해당 지역과 클럽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국내 축구문화의 발전 때문이다. K-리그 클래식에는 무려 14개 팀이 있다. 팀마다 고유한 역사가 있고 팬들의 구성도 다르다. 똑같은 항구도시라도 부산의 기질이 다르고 인천의 공기가 다르다. 대기업이 주도한다 해도 수원의 열정이 다르고 울산의 함성이 다르다. 동일한 모기업을 두고 있지만 포항의 강건함과 전남의 강렬함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런 역사, 그런 문화, 그런 기질의 섬세한 차이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그 지역의 팬들과 만나는 것이 진정한 프로다. 그렇게 될 경우, 그 지역 팬들은 한두 해 머물다 떠나갈 선수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을 위해 공을 차려는 선수로 열렬히 환영하게 된다. 축구 선수가 축구 외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모두가 공생하게 된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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