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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아름답다. 지네딘 지단은 말했다. “언제까지나 지금 이 상태로 플레이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공과 일체가 되어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최고의 상태 말이다.” 이럴 때 스포츠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월드클래스 못지않게 전 세계 경기장에 자기 영역을 표시했던 이영표 선수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작년 여름 내가 물었다.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그렇게 물어보면서 나는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강렬했던 순간들, 예컨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 1초 전의 극적인 어시스트라든가, 유럽에서 치른 산전수전의 결정적 장면을 얘기할 줄 알았다.
그랬는데, 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토트넘에서 뛸 때, 절묘하게 패스했던 순간을 그는 떠올렸다. 공이 허공에서 멈춘 듯했다, 고 그는 말했다. 그 순간, 이영표 선수는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고 실제로 공이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된 듯했다, 고 말했다.
이때, 스포츠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고속 카메라에 포착된 10점 만점의 화살, 네트 위를 절묘하게 넘어가는 테니스공, 아슬아슬하게 홈플레이트를 스치는 손, 중력을 잊은 듯 높이 비상하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도약. 이는 비단 최고의 선수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더러 만나게 되는 섬광처럼 빛나는 순간들이다. 김수영 시인의 표현대로, ‘문갑을 닫을 때 뚜껑이 들어맞는 딸각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 우리의 자전은 세상의 공전과 일치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물었다. 진짜 스포츠는 아름다운 것이냐고. 그는 스포츠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운동선수들, 특히 아직 ‘선수’라기보다는 ‘학생’임에도 ‘학생선수’라는 애매한 정체성으로 모호한 갈림길에 있는 청소년들의 인권 양상을 광범위하게 실태조사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합숙소에 조사를 나갔다. 아이들은 이것저것 묻는 대로 대답했는데, 조사를 마치고 돌아설 때, 어느 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집에 가고 싶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스포츠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었다.
지금 한국의 스포츠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동안의 국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국위선양’에 의하여 숱한 문제가 양산되어 왔고 그에 따라 ‘국민체육진흥법’ 1조 목적의 ‘국위선양’이 ‘연대’ ‘인권’ ‘공동체’ 등으로 대체된 것이 단적인 예다.
일종의 ‘정반합’이랄까. 기존의 ‘국위선양’(정)과 그것이 낳은 폐해를 인권이나 문화적 관점에서 비판하지만 현재로서는 사건대응적(반)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기존 ‘국위선양’ 입장에서는 ‘희생’ ‘극기’ ‘국위선양’ 등으로 스포츠를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그에 기반한 체제를 고수한다. 그것이 스포츠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왜곡하고 반인권적 상황을 고착시키고 있다는 비판의 입장에서는 ‘인권’ ‘연대’ ‘다양성’ 등의 관점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재구성하려 한다. 이는 ‘경쟁’과 ‘승리’를 행위 규범의 절대 가치로 강조하는 기존의 입장(정)과 그 과정의 인권 상황이나 그 목적의 다양성을 강조(반)하는 입장으로도 나뉜다. 현실에서는 대한체육회의 조직 운영과 사업에 대한 판단도 상이하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를 ‘엘리트체육 대 생활체육’이라는 매우 편협한 이분법으로 비틀고 있다. 의미 있는 담론과 건강한 논쟁을 한낱 ‘세력 다툼’으로 왜곡시키는 조야한 관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국위선양 패러다임이 시대적 소명을 다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를 ‘엘리트 대 생활’이라는 졸렬한 구도로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인권과 문화의 거울로 기존 스포츠를 판단했던 관점도 한 걸음 더 나가 그러한 가치를 스포츠 내부에서 찾아내야 한다. 기존 스포츠에 당대의 가치를 기계적으로 접목하는 게 아니라 스포츠 내부에서 그 아름다움을 발양해야 한다.
그런 아슬아슬한 평균대 위에 한국 스포츠가 놓여 있다. 스포츠에 대한 확장된 개념과 다양한 가치, 그에 따른 국가 정책과 사업 과제 등이 수립되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다. 그 ‘합’에 이르기 전에는, 스포츠가 아름답다는 표현은 유보되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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