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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논란이 거세다. 보수층은 한·중 ‘사드 합의’를 ‘삼전도의 굴욕’에 비유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찧은 장면은 소설 <남한산성>에 잘 묘사돼 있다. 사드 합의 후 중국의 한국 압박이 도가 지나친 건 사실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고 리커창 총리가 ‘장애물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사드 보복으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중국의 이중적인 사드 대응도 짚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정치·외교적 압박과 경제적 대응 조치를 실행하면서도 미국에는 실질적 대응을 자제하는 이유가 수상쩍다. 사드가 자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임박한 위험이 아니거나, 이미 대처 가능한 수준의 위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응할 리 없다. 미국과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만만한’ 한국만 공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미국이 중국의 한국 압박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석연찮다. 한국이 주한미군 보호를 위해 사드를 배치하고 곤경을 겪는 것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동맹의 자세가 아니다. 한국의 ‘3NO’ 방침에 대해 “한국이 주권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허버트 맥마스터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발언은 내정 간섭에 가깝다. ‘사드 난국’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발목을 잡는 셈이다. 한국은 사드 운용 권한이 일절 없다. 묻고 싶다. 과연 한국에 ‘사드 주권’이 있기는 한 건가? 없는 주권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나?

주권 포기는 박근혜 정권의 ‘최종적이고 불가역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가리킬 때나 사용하는 말이다. 가해국 일본이 피해국 한국에 되레 큰소리치게 만든 합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인 한일청구권협정도 마찬가지다. 대대손손 한국을 옭아매는 ‘족쇄 외교’ 때는 문제 삼지 않다가 ‘사드 외교’를 주권 포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쳇말로 내로남불이다.

북핵과 미·중, 남북 갈등이 중층으로 얽힌 한반도 정세에서 단선적인 외교노선 추구는 답이 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 풀도 뜯어야 하고 중국 풀도 뜯어야 산다고 했다.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중국과도 협력해야 산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긴 역사로 보면 동맹과 적대국은 돌고 돈다. 한말에 일본은 러시아 편을 든 명성황후를 살해했고, 그런 일본에 거액의 러일전쟁 비용을 댄 것은 미국이었다. 중국의 거친 사드 압박에 반발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렇다고 중국을 졸부, 오랑캐라며 없는 말을 지어내 경멸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보수 일각에서는 중국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실력도 없으면서 명분만 앞세워 신흥강국 청과 싸우자고 주장하던 조선의 척화파와 다를 바 없다.

영화 <남한산성>은 삼전도의 굴욕에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의 역사를 더 주의깊게 챙겨봐야 한다.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6년 후 청나라 수도 심양의 감옥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감옥 안에서도 의견대립을 계속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나라를 위하는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항복문서를 찢은 김상헌과 찢어진 종잇조각을 다시 붙인 최명길은 화해했다. 역사서는 이를 아름다운 화해였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가 남자는 노동노예로, 여자는 성적 노리개로 팔려나간 참혹한 현실을 한 치도 개선 못하는 화해를 아름답다고 할 순 없다. 특히 백성을 지옥에 몰아넣고도 무책임하게 명나라만 추종한 김상헌의 절개를 칭송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무능했던 인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명길은 달랐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도 임경업 장군의 탈출 사건 때 스스로 죄를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 역시 조선노예 구출과 대신들의 옥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국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챙기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지배층은 삼전도 굴욕 후에도 미망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멸시했다. 열등감이 왜곡된 우월감으로 변환되는 이런 심리는 식민의 쓰라림을 안긴 일본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조선 실학자 박제가는 “중원 천하를 다스리는 청이 오랑캐인가, 아니면 변방에 웅크리고 앉은 조선이 오랑캐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381년 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한 날이 열흘여 뒤다. 17세기 조선이 선택한 명분은 실패했다. 21세기 한국의 선택은 실용이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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