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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새로운 물증이 나왔다. 바로 북한 경제의 성장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경제는 전년 대비 3.9% 성장했다. 17년 만의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나아진 것은 지표만이 아니다. 장마당 등 시장이 활성화하고, 시장에 나온 소비재의 거개가 중국산에서 북한산으로 바뀌었다. 내수산업이 회복하고 농업생산성도 증가했다. 대북제재가 성공적이라면 북핵 개발 억제 혹은 경제파탄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 시대 북한 경제는 남한을 압도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경제 규모가 크고 주민 개별 삶도 상대적으로 윤택했다. 냉전시대 옛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 내 무역과 지원의 결과다. 그러나 이번 경제 성장은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사상 유례없는 제재와 압박 속에서 일궈낸 성과다. 외부의 도움은 중국의 지원이 전부다. 그럼에도 남한 경제성장률을 크게 앞지르는 성과를 냈다.

김정은 정권은 북한 경제의 성장을 ‘핵·경제 병진 노선’의 승리로 평가할 만하다. 고강도 대외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력갱생을 해냈기 때문에 더욱 각별할 것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다면 김정은 체제의 내구성은 견고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체제 측면에서는 경제 성장이 마냥 긍정적인 의미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성장의 원인을 분석해보자.

이번 북한 경제의 성장은 ‘장마당’과 ‘포전담당책임제’의 활성화에 따른 것이다. 김정은 정권 들어 장마당은 200개에서 400개로 늘었다.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종사한다. 포전담당책임제 역시 김정은 정권 들어 크게 발전했다. 북한 주민이 의식주를 배급으로 해결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생활 수요의 대부분을 시장에서 충당한다. 문제는 두 제도가 사유재산과 인센티브 등 자본주의적 요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 정권의 주민 통제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만큼 북한 체제에 위험한 것은 없다. 지도부의 권위와 권력을 약화시키고, 통치질서에 구멍을 뚫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북한은 ‘유일사상 10대원칙’에 시장화 과정에서 확산된 부르주아 사상과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위기의식을 명시하고 있다. 북한 경제의 성장은 주민통제 측면에서는 모래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한 해의 경제성장을 두고 북한 체제 내구성과 연계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다년간의 노력으로 도입한 자본주의적 정책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장 활성화의 효과를 체감한 북한 주민은 더 큰 풍요와 안정을 바랄 것이다. 주민 누구도 생존의 한계치로 내몰렸던 피폐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주민 통제와 기본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 활성화 사이에서 임계점을 넘나드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그동안 북한 체제의 내구성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도산과 종주국 옛 소련의 해체, 그리고 중국의 개혁과 독일 통일, 최고지도자들의 잇단 사망과 대기근에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외의 원조 중단과 핵개발로 야기된 국제사회의 고립정책과 경제파탄이라는 위기에서도 자신들만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버티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에 북한이 직면한 도전은 대외의 압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제기된 것이다. 북한은 지금껏 한 번도 안 가본 길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도전에 부닥친 것은 김정은 정권만이 아니다. 북한의 경제 성장은 국제사회가 북한 문제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의 제재·압박은 핵개발 등 김정은 정권의 ‘나쁜 행동’을 벌주고, 분풀이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실질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계속 제재와 압박에 매달리는 것은 속수무책으로 북한 정권에 대한 울분만 풀어보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핵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와 거꾸로 하면 된다. 북한이 시장을 키우고 대외 교역을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의 해외 노동자 파견도 축소하지 말고 확대하도록 적극 협력하는 게 북핵 해결에 기여하는 길이다. 북한의 대내 결속을 도와주는 봉쇄정책을 버려야 한다. 중국 역할론도 허망하다. 중국은 대외적 압박이 북한의 체제붕괴를 초래하지 않도록 노력할 게 뻔하다. 그보다는 김정은을 태운 호랑이가 속도를 더 내도록 채찍질하는 게 맞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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