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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어디선가 본 듯한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즈음 이 단어가 불쑥불쑥 떠오른다. 어디서 본 것인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무릎을 쳤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6년 전인 2008년 5월이다.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초 미국을 방문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대폭 양보했다. 그러자 광우병을 우려한 광우병 촛불집회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집권 두 달 만에 엄청난 위기에 몰려야 했다. 광화문에 컨테이너로 ‘명박산성’을 짓는 등 진압에 나섰지만 시위는 일파만파 커져만 갔다. 저항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이 대통령은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을 청와대 뒷산에서 보며 ‘아침이슬’을 불렀다며 굴욕적인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박근혜 정부도 최근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명박 정부에 비해 일년 늦어졌다는 차이는 있지만 세월호 참사 때문에 비슷하게 심각한 위기에 처하고 만 것이다. 세월호는 여러 면에서 광우병 사태와 다르다. 광우병 사태는 소고기 수입에 따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일어난 것인 반면 세월호는 꽃 같은 우리들의 자녀들을 포함한 수백명이 실제로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원인도 다르다.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방미 선물로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미국에 지나친 양보를 했다는 국민적 분노가 원인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대형 여객선의 어이없는 침몰이라는 사건 자체는 규제완화라는 이름 아래 낡은 선박의 구입을 허가한 이명박 정부의 무책임한 살인정책으로부터 황금에만 눈이 먼 악덕기업과 비정규직 시스템, 이 모두의 가치전도를 가져온 신자유주의 등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사고도 사고지만 정작 문제는 소중한 인명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구조시스템, 나아가 구조과정에서 보여준 관료, 언론, 국회, 나아가 사회지도층의 민낯에 있었다. 한마디로,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총체적 부실과 무능을 응축적으로 보여줬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서 당연히 책임이 있지만 광우병 사태와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일차적인 책임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잘못된 대응으로 비판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자초해 왔고 그 결과 일부에서는 대통령 퇴진론까지 나오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광장에 세월호 희생자 추모 촛불리본


박 대통령이 이번에 보여준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희생자들, 나아가 국민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공감능력’의 부재이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은 국민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해야 한다는 ‘권위의 정치’ 내지 ‘초월의 정치’에 너무 익숙해 국민과 고통을 함께하는 ‘공감의 정치’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누적된 적폐 운운하며 자신의 책임보다는 이전 정권과 관료들만 탓하다가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직접 사과를 했지만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그 진정성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빗발치는 경질 여론에도 불구하고 김기춘 비서실장을 끌어안고, 유가족들이 국회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데도 새누리당이 김 비서실장을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다고 며칠씩 버티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박 대통령의 눈물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겠는가? 시급한 것은 공감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사실 공감능력의 부재라는 면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광우병 사태와 현재의 유사성을 바라보며 우려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촛불이 꺼진 이후이다. 민주당은 2007년 대선 패배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없이 촛불시위, 이어진 비극적인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덕으로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 오만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해 박근혜 정부를 만들어줬다.

세월호 사태로 인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오는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면하게 됐고 잘하면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승리는 광우병 사태와 마찬가지로 ‘축복을 가장한 저주’가 될 가능성이 크다. 즉 세월호 덕분에 예상 밖의 승리에 도취해 자기혁신을 미루다가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다시 한번 패배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쳐낼 수가 없다. 정말 역사는 반복하는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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