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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 성군 세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는 죽임을 당한 백성들이 억울함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법의학 교과서이자 범죄 수사 및 재판의 기본과 원칙을 정한 <신주무원록> <증수무원록> 및 <증수무원록대전>과 그 언해본을 연이어 만들었다. 그 원전은 중국 원나라 때 왕여가 쓴 <무원록(無寃錄)>으로, 고려말에 유입되었다가 1796년(정조 20년)에 많은 오류가 수정되고 개선된 한글판으로 완성된 것이다. 서양 ‘형법학의 시조’ 베카리아가 일반적인 형사법의 원칙을 주장한 <범죄와 형벌>을 쓴 것이 1764년, ‘범죄학의 아버지’ 롬브로조가 단순한 범죄자들의 외형관찰을 기록한 범죄인류학 저작들을 출간한 것이 189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체의 세밀한 구조와 사망의 다양한 원인에 따른 사후 변화와 경과시간들이 포함된 <증수무원록>이 18세기 조선에서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 이면엔, 주로 살인 등 강력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약하고 힘없는 민초 한 명 한 명의 억울함이 조정과 임금의 무거운 책임으로 남는다는 우리 세 성군들의 어질고 따뜻한 헤아림과 공감이 있었다.

그 후예들인 우리 대한민국에서 지난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295명의 참혹한 죽음과 9명의 오랜 실종 상태가 남긴 원과 한, 억울함이 여전히 온 하늘을 뒤덮고 있다. 김훈 중위와 허원근 일병 등 아직 명확한 죽음의 원인과 책임이 밝혀지지 않은 군 의문사의 억울함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 그 외에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들, 유괴살해당한 이형호군, 포천에서 피살된 여중생 엄양, 서울 노들길에서 살해된 20대 여성 진씨, 화성에서 살해된 노양, 대구 황산테러 피해자 김태완군, 대구 달성군에서 납치살해된 허은정양,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 피해 어린이들, 충북 영동에서 손목이 잘린 채 살해된 정소윤양 등 20건이 넘는 중요 미제 살인사건들이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지나가면서 ‘영원한 억울함’으로 남고 있다.

경제, 산업, 노동, 복지, 교육, 국방, 문화, 건설교통, 환경…, 어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마는 사람들이 사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파괴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그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위에 열거한 국가기능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도 만고불변의 진리다. 오죽했으면 1776년에 독립국가를 세운 미국의 연방정부 법무부 청사에는 ‘오직 정의만이 사회를 지탱한다(Justice Alone Sustains Society)’라는 글이 새겨져 있겠는가?

서북청년단의 세월호 반대 집회에 참가했던 노병만씨가 8일 서울시청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를 찾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각종 의문사와 미해결 살인사건, 세월호 참사 등을 자꾸 ‘잊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국가의 존립 이유와 정부 역할의 본질, 국민의 기본 권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애써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다. 세종과 영조와 정조 세 분 훌륭한 임금님들의 뜻을 거스르는 불충을 하는 역적들이다. 기껏 5년 집권하다가 역사 속 먼지가 되어 사라질 정권이나 그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는 몇 개인들의 안위를 위해 ‘나라와 백성의 억울함’을 모른 체하고 덮고 잊자는 자들이 있다면 발본색원하여 가장 무거운 벌로 처단해야 국가기강이 바로 선다. 반대로, 그 엄중한 ‘억울함을 없애는’ 국가적 대의를 개인이나 당파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악용하고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역시 철퇴를 내려야 할 것이다. 진실규명 노력 못지않게 살인, 어린이 유괴, 성폭행 등 ‘특정 반인권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입법과 죽음의 원인을 조사하고 결정하는 ‘검시권’을 의학적 문외한인 검사에게서 전문가인 법의관에게로 이관하는 ‘검시제도’의 확립 역시 긴요하다. 새해에는 부디, 새로운 억울함이 남지 않고, 쌓인 억울함들이 풀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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