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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최초의 근대 경찰을 창시한 로버트 필 경은 ‘국민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경찰(policing by consent)’ 개념을 확립했다. 그가 제시한 9개 항의 ‘경찰원칙’은 지금까지 전 세계 경찰의 철학적 바탕이 되고 있다.

① 경찰은 군대의 폭압이나 엄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미연에 범죄와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②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힘은, 시민의 지지와 승인 및 존중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③ 경찰에 대한 시민의 지지와 승인 및 존중을 확보한다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경찰의 업무에 대한 시민의 적극적인 협력 확보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④ 시민의 협력을 확보하는 만큼, 경찰 목적 달성을 위한 강제와 물리력 사용의 필요성이 감소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⑤ 시민의 지지와 승인은 결코 여론에 영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공정하고 결코 치우침 없는 법집행을 통해서 확보된다. 즉 절대적으로 중립적인 정책, 부나 사회적 지위 등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대우, 언제나 예의와 친절 및 건강한 유머를 견지하는 태도, 그리고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갖춰져 있는 경찰관의 모습 말이다. ⑥ 경찰 물리력은 반드시 자발적 협력을 구하는 설득과 조언과 경고가 통하지 않을 때에만 사용해야 하며, 그때에도 필요최소한 정도에 그쳐야 한다. ⑦ 언제나 경찰이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경찰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경찰-시민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⑧ 언제나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역할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되며, 유무죄를 판단해 단죄하는 사법부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⑨ 언제나 경찰의 효율성은 범죄와 무질서의 감소나 부재로 판단되는 것이지, 범죄나 무질서를 진압하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9가지 원칙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 경찰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진정한 경찰’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찰 옷을 입고 있더라도 ‘경찰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과 근대화로 몸살을 앓고 있던 당시, 식민지 아일랜드의 총독을 거쳐 영국 내무장관과 총리를 두 차례나 지낸 전형적인 보수 정치인이었던 로버트 필이 ‘경찰은 제복 입은 시민’임을 내세우며 시민의 지지와 협력, 승인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경찰을 강조한 이유는, 체제를 수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법을 지키고,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찰의 존재로 인해 사회 혼란은 줄어들었고, 범죄와 무질서는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조절되었던 것이다. 시민을 위한 봉사나 복지의 얼굴 뒤에 ‘가장 효율적인 시민 통제 수단’의 의도가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키아벨리적인, 치밀하고 지능적인, 스마트한, 보수주의적 국가운영의 예라고 볼 수도 있다.

정윤회씨 국정개입에 관한 청와대 내부 문건 유출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지난 12월 서울 남산 서울경찰청 정보 1분실을 압수수색하기 위해 검찰 직원들이 들어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금 대한민국의 경찰과 점점 경찰화되어 가는 검찰의 모습은 이와 너무나 대비된다. 최선을 다해 힘자랑을 하고, 권력과 돈을 가진 자의 편임을 경쟁적으로 내세우며, 평화적인 수단으로 범죄와 무질서를 미연에 방지하기보다 스스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며 강력한 물리력이나 법 권력을 휘두르는 활극을 연출한다. 하지만 정작 강하고 악한 범죄자 앞에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다. 그러니 시민이 경찰과 검찰을 동료보다는 감시자로 보며 경계하고 의심한다. 화재나 수해 등 위기 상황에서 시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선 경찰관과 소방대원들이 그나마 국가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지만, 세월호 참사 등에서 보여주는 공권력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이대로는 시민의 안전과 평화,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경찰과 검찰을 권력의 치마폭에서 시민의 넓은 품으로 돌려주라. 그것이 국가와 체제, 헌법을 수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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