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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범죄 보도와 관련해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 신조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엉뚱한 사람의 얼굴을 파렴치 범죄자라며 1면에 싣거나, 피해자의 신원을 짐작하게 할 만한 정보를 마구 기사에 공개하거나, 무리하게 범죄 사건의 잔혹하고 흉측한 측면만을 과장하고 포장해 관음증을 부추기는 경우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범죄보도가 정치·사회적인 민감한 이슈들을 덮는 추악한 도구로 이용된다는 세간의 의혹 또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09년 1월,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 경찰청 홍보담당관(지금의 대변인)에게 “용산사태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홍보하라”고 요구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이런 의혹은 근거를 부여받게 되었다. 아울러, 경찰관서마다 각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경찰과 협력을 주고받는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는 상황 역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발생한 안산 김상훈 인질살해사건의 경우, 경기지방경찰청 출입기자들이 자신들만을 위한 별도의 브리핑을 해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경찰이 수사와 현장 통제보다 ‘기자 모시기’에 더 많은 애를 썼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기자들이 수사기관이 제공하는 편의와 정보 및 보고를 누리는 대가는, 주는 대로 ‘받아쓰는’ 기사 용역이다. 최근 이인규 전 검사의 폭로로 드러난 ‘노무현 시계 논두렁’ 사건이 대표 사례다. 시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감시자요 고발자여야 할 언론이, 오히려 권력을 위한 도구와 사회 문제를 덮고 감추는 가리개 역할을 하는 현실은 ‘언론자유 지수 세계 64위’라는 치욕으로 귀결된다. 수습생과 초년 기자들을 경찰서로 보내서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노예로 부리는 한국 언론의 범죄 보도가 철학과 가치관, 의미를 담고 사회적 파장을 고민하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 모른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끝없는 오보와 정부편향보도로 국민들에게 ‘기레기’(기자+쓰레기)로 통칭되는 언론 불신이 만연하여, 부끄러운 언론인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는 마음을 담고 언론인들은 시국선언문을 통해 반성의 자리를 마련했다. (출처 : 경향DB)


1996년 6월28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자유 포럼’에서는 아일랜드 최고의 범죄전문기자로 인정받고 있던 베로니카 구에린의 기조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연설 제목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을 밝히는, 위험에 처한 기자들’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아일랜드의 조직폭력과 마약밀매단, 그리고 유력 정치인 사이의 유착 의혹을 쫓는 구에린의 생생한 이야기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연설이 있기 이틀 전,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구에린의 차량에 6발의 총탄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 탄 2인조 마약조직원들은 피 흘리는 구에린의 시신을 남긴 채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자리는 구에린 못지않은 사명감과 집념, 그리고 전문성을 갖춘 범죄전문기자 폴 윌리엄스에 의해 다시 채워졌다. 구에린의 유업을 이은 윌리엄스 역시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범죄 사건과 조직과 환경을 파고들었고, 이들의 노력은 경찰이나 국가가 밝히지 못한 범죄의 속살을 드러내고 진단과 처방을 가능하게 했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유력 일간지 가디언에서 23년간 범죄전문기자로 활약한 던컨 캠벨의 기사와 칼럼들은 대학 범죄학과에서 참고자료로 자주 활용되고 학술논문에도 인용된다. 퓰리처상을 2차례나 받은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도널드 발렛은 또 다른 예다. 범죄전문기자의 특징은 전문성과 사명감,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고집과 독립성이다. 평생 범죄문제를 파헤치고, 부패한 관료나 법조인 혹은 경찰의 의혹을 쫓아 다녀야 하기에 위험과 외로움을 친구 삼아야 한다. 이들은 경찰관서에 기자실을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련해 준다 해도 독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절할 것이다. 그들이 있기에 일반 시민이 잘 모르는 어두운 거래나 협잡이 묻히지 않으며, 끔찍한 범죄를 부르는 사회 문제의 본질이 공론의 장에 오를 수 있다. ‘기레기’ 소리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 우리 범죄보도 관행, 개선되어야 한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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