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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흡 동국대 교수

<소통기획위원 평가>
ㆍ추상적 총론은 공감대 형성
ㆍ구체적 각론선 첨예한 대립
ㆍ둘 아닌 모두와 소통 아쉬워


경향신문의 소통실험이 거듭되면서 소통에 관한 일종의 경향성이 감지된다. 총론에서는 상대와 충분히 합의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며 열린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각론에서는 결국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의견대립의 긴장을 높이고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는 담론의 기술이 거의 모든 대담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를 두고 총론에서만이라도 합의에 이르는 공감대를 마련했으니 소통의 첫걸음을 뗀 ‘발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통한 것이냐는 본질적인 질문에 비춰보면 소통에 관한 다양한 테크닉만 동원됐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 또한 가능해진다.


이번 대담도 이런 일반적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두 토론자들이 총론에서 상호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각론에서는 견해 차이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촛불집회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연관된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례를 논의할 때 뚜렷한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진보와 보수의 문제라는 다소 추상적이며 거시적인 영역에서는 합의의 지점에서 대담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문제다. 예를 들어 “보수든 진보든 낡은 구도를 넘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거나 “정당 활동을 하는데 시민단체 외피를 쓰고 하면 안 된다”는 매우 원론적인 얘기를 바탕으로 동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가 그렇다. 문제는 총론과 각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 오히려 전략적으로 분리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추상적인 총론의 영역에서 합의를 양보한다 해도 총론에서 벗어난 구체화된 의제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의 문제를 논하는 토론장에서 총론적 합의를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미 대담의 형식이 강요하고 있는 내재적 산물이기가 쉽다. 경향신문 소통특집의 효과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진영의 유연성을 과시하는 또 다른 효과도 함께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수순, 전략, 경향성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맥락에서 현대정치의 모순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대중의 지지로 가능한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뒤집혀 역설적으로 대중이 거세되고 소수만으로도 정치를 꾸려갈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 말이다. 대중의 욕망과 판단이 바탕이 되고,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수렴한 소통구조에서 정치가 이뤄지기보다, 담론의 테크닉에 의존한 소통으로 정치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진정성’을 담아 대중과 교감하려는 소통과정은 이제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큰 틀에서 진보와 보수가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이 소통의 장에서 그리고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다. 각론을 총론처럼 이야기하고, 부분적 진실을 전체의 진리로 포장하며, 가치의 문제를 사실같이 제시하면서 대중을 오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 현대정치의 원리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 대담에서 제도변화를 초래하지 않았으므로 민주주의의 후퇴는 없다는 주장과 제도를 운영하는 방식과 절차를 문제 삼는 주장이 서로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데, 대중이 누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비교적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는 얼마나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의 일상적 경험과 부합된 논리로 소통을 시도했느냐가 대중들이 내리는 판단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두 토론자의 대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분모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촛불집회, 미디어법, 4대강 정비 사업을 포함한 환경문제 등과 같이 매우 구체적인 각론의 문제를 대중의 일상생활과 유리시켜 아무런 감흥도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지만, 각자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가 결국 추상적 거대담론에 기대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봤을 때 둘은 모두가 똑같은 ‘제도권’의 ‘공식 언어’를 공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정부 대변인과 농성현장을 취재한 뉴스로 익히 들어왔던 바로 그 딱딱한 언어인 것이다.


소통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름지기 대중과의 공감대를 확대해 나가는 일이다. 대중이 사회와 정치 그리고 국가의 중심이 맞는 얘기라면 말이다. 그러나 소수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나마 대중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경제와 상징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모습을 먼저 보이면서 대중을 포용하는 과정을 공식 언어가 아닌 진정성이 담긴 대중의 언어로 풀어썼을 때 그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의 눈에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인다면 그것은 필시 담론적 대립이나 총론적 합의가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익을 위한 ‘이미지 쇼’로 판단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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