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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ㆍ“소통의 엘리트주의·양극화 함정 지적엔 전적으로 동의”
ㆍ강준만 교수 특별기고 경향신문 소통특집은 ‘절반의 성공’
ㆍ<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에 대한 나의 의견>


나는 경향신문의 소통 특집을 한국 진보 언론의 획기적 업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는 진보 언론의 가장 큰 문제가 비전과 대안보다는 비판과 저항에서 정체성을 찾는 관행이라는 나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업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최장집 교수의 기고문과 관련돼 있다.

최 교수는 경향신문 지식인 설문 결과 ‘소통 잘하는 인물’ 3위로 꼽혔다. 보수 인사들로부터는 ‘소통할 만한 진보 인사’로 선정됐다. 나는 왜 그가 1위로 뽑히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이 결과만으로도 그가 소통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소통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노무현 정권 시절이 훨씬 더 심했다. 이명박의 선거 공약은 애초부터 개혁·진보파와 소통 가능한 게 아니었다. 노 정권은 그런 문제에 더하여 다수 지지자들과의 소통도 외면했다. 최 교수는 당시 노 정권이 잘못 간다고 경고한 내부 비판자였다. 그때 친노 세력이 최 교수를 향해 퍼부은 비판은 ‘언어 폭력’의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난 대선·총선의 비참한 결과는 친노세력의 이런 독선과 오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개혁·진보세력이 노 정권을 돕지 않았다며 원망하고 있다.


소통 다루는 방식 잘못됐다면 다른 방향에서 중요성 역설을

나는 이 문제가 반드시 거론될 것이라 믿었고, 이와 관련된 최 교수의 발언을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최 교수와 경향신문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기고문 내용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 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라는 최 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한 건 왜 최 교수가 그런 의문마저 소통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경향신문이 소통을 다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으면 그걸 지적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념의 차이를 소통으로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노 정권 시절 최 교수와 친노 세력의 차이는 이념의 차이는 아니었다. 방법론의 차이였다. 물론 그 차이도 소통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제시했을 때 그걸 대하는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진보적이긴 하지만,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적 가치보다는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들은 열성 추종자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세상과 멀어지면서도 세상 탓만 한다. 어쩌면 이런 의식이나 행태는 이념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로 이런 경우를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인간소통학 개론’은 독선, 오만, 탐욕, 완고, 경박, 자폐성, 피해의식 등과 같은 개인·집단 심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통이 심리학만의 영역은 아니다. 소통의 정치경제학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학 교과서들은 실제 정치 행위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한국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지대추구(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가 부문의 자원과 영향력에 접근하여 수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줄서기·줄세우기’인데, 이런 건 거의 다루지 않고 서양 이론만 화려하게 나열돼 있다. 직·간접적으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권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느껴도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위 공직, 영향력 행사, 인정 욕망 등과 같은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관계는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곧잘 신념으로 둔갑하곤 한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내부고발’보다는 ‘조폭식 의리’를 더 멋있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가는 정권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시도를 하는 건 속된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니다.

나는 그런 문제까지도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개혁의 지점은 명확해진다. 시위에 의존해 판을 엎어보려는 단기 모험주의, “우리편 이겨라”를 외치면서 우리편의 승자독식을 꿈꾸는 한탕주의보다는 장기적으로 지대추구와 맞물린 전 사회 영역의 정치화·정략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우선이라는 깨달음이 올 것이다. 즉,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왜 소통이 안 되는가?” 하는 문제 의식으로 접근해 문제점을 발견하면 정치경제적 개혁 의제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걸 다룸으로써 사회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미 끝난 정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걸까? 그렇다면 지난해 촛불시위 정국으로 돌아가보자. 주류파를 형성한 많은 개혁·진보적 지식인들이 감격이 지나쳐 허황된 촛불시위 예찬론을 펼 때에 최 교수는 냉정하게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차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대안은 피가 끓는 그들의 공격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 벌어진 사태는 최 교수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입증했다. 일부 과격파들의 화끈한 담론과 행동은 이명박 정권에 정권 전복의 가능성에 대한 과잉된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그래서 이후 이명박 정권이 사실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된 건 아닐까?



한국정치는 ‘지대추구’·줄서기 이해관계도 소통문제로 접근

그러나 그들은 이마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이해심이 지나치다며 음모론을 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 교수의 발언 당시 일부 촛불시위 예찬론자들의 입에서 “최 교수가 이명박 정권에서 한 자리를 하려는 건 아닌가?”라는 따위의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은 정신 나간 예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게 사이버 정치담론의 평균적 수준이다. ‘지도자 추종주의’와 더불어 ‘정치의 종교화’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인 동시에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게 이념의 문제인가, 소통의 문제인가?

이 물음을 파고 들면 우리는 사회적 소통 구조와 관행의 문제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양극화 상업주의’ 논리와 ‘적대적 공존’의 원리에 주목해보자. 정치사회적 갈등 시 강경한 주장이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의 장사에 도움이 되고, 갈등을 빚는 세력들 내에서 강경파들끼리 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된다. 의도는 순수한 것이라 해도 그런 원리에 의해 강경파의 발언이 필요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됨으로써 소통은 시궁창에 처박히고 만다. 내가 보기에 최 교수의 기고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도 바로 다음과 같이 언론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정치·경제 개혁의제 찾으면 사회진보에 기여할 수 있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여론 형성은 주류언론들이 압도적인 영향력과 더불어 이슈를 설정하고, 지식인들이 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언론은 자주 보수언론에 대한 거울이미지로 반대 논리를 제시해왔다. 그러면서 사회의 집단적 의사형성은 냉전반공주의나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에 의해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은 이렇게 정형화된 이념 범주로 분류되어, 언론매체들을 통해 사회화되고 정치화되었다. 사회의 의사형성이 언론과 지식인 엘리트들에 의해 선점되고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 범위로 한정되는 조건에서, 공공여론이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이슈화하기는 쉽지 않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 엘리트주의라는 특징과 아울러 그러한 의사형성과 여론이 사회현실로부터 크게 괴리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의 소통이 빠져있는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한 이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최 교수께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라고 소극적으로 말씀하실 게 아니라, 소통에 관한 소통의 문제를 주로 ‘우리편’을 향해서 적극 제기하자는 제안이다. ‘우리편’이 달라지면 ‘상대편’도 달라진다. ‘상대편’이 먼저 달라져야 ‘우리편’도 달라진다는 주장은 일리는 있지만, 누가 더 아쉬운 입장인가 하는 걸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간 이미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해온 최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면서, 경향신문이 나머지 절반의 성공도 쟁취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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