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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사회적 논의의 주제가 된 데는, ‘불통정부’라는 말이 지칭하듯,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정치적 조건에서 소통의 의미는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

첫째는 사회적 의견이 적대적 양상을 보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

둘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소통 부재를 가져온다.

셋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소통은 위기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소통문제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 하겠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정치갈등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인식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복고적 성격이 강한 이런 이해방식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정치경쟁을 선악개념으로 치환하고 집단적 열정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일방의 진영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에서, 내부 비판이 자유롭게 표출돼 여러 의사형성이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다원적인 세력형성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세계화로 빈부격차·노동문제, 사회적 상향이동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사회구조 등 풀어야 할 여러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소통 대 불통’이든 ‘민주 대 반민주’든 양극화의 논리·담론은 현실변화의 문제를 대면하고 다루는 데 부응할 수 없다.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서민·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경찰·사법·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런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양극화 비전에 입각한 신문 논조는,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보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야당(들)은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

민주정치에서 소통은 투표에서 다수의 평결을 통해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의 함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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