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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6) 금융자본의 위험한 게임 (下) 키코 - 무너지는 중소기업





장관순·유희진기자


전자업체 ㄱ사의 재무담당 임원 ㄴ씨의 요즘 일과는 이른 아침 다우지수 시황 및 해외 환율 동향을 체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키코라는 게 하루하루 속을 태우고, 뒤집고, 바싹 졸이면서 서서히 사람을 죽여가더라”고 했다.

“외환시장이 개장하는 아침 9시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데, 불안감 탓에 오후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환율이 하루에 50~100원 왔다갔다 할 때마다 회사 돈 6억~7억원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게 보여요. 안 그래도 요즘 회사가 극심한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대로 당하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계약 때 키코 상품 위험 듣지 못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치솟은 환율로 중소기업의 외환 손실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출기업이라면 환차익을 얻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환율 변동에 대한 보험 격인 키코(KIKO, Knock-in Knock-out 통화옵션)라는 금융파생상품의 족쇄가 중소기업을 옭죄고 있다. ㄱ사는 지난해 매출 700억원대에 이어 올해 1000억원 정도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손익구조는 역전됐다. 지난해 13억원 상당의 영업이익을 올린 것과 달리 올해는 무려 130억원대의 순손실이 예상되는 것이다. 순손실 금액은 이 회사가 키코에 가입하는 바람에 입은 손실액과 같다.

이 회사는 유로화 환율이 1200원선이던 지난해 여러 은행과 키코 계약을 맺었다. 1년간 유로환율이 1200원 아래로 내려가면 은행들이 유로당 1260원씩 150만유로를 환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1년간 한 번이라도 1300원선을 뚫고 올라가면 최고 300만유로를 그 시세대로 비싸게 사다 각 은행에 1260원씩에 팔아야 하는 위험이 있다. 유로환율은 현재 1800원대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런 위험을 알았다면, 절대 가입 안했겠죠. 은행은 우리가 떠안을 위험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어요. 은행이 좋다고 하니까 좋은 줄만 알았던 겁니다. 은행 측은 ‘남들 다 가입했는데 무능한 ㄱ사만 안했네’ 식으로 몰아갔어요. 거기에 당한 거죠. 그런데 올들어 정작 문제가 터지니까 은행 지점장들이 ‘당신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했지 않느냐’고 말을 싹 바꾸더군요.”

ㄱ사는 올해 안으로 보게 될 키코 관련 직·간접적 손실을 130억원으로 보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계약에서도 60억원 이상 손실이 날 것으로 예상돼, 이 회사의 키코 관련 총손실은 200억원대다. 회사는 정부의 유동성 지원 자금을 20억원 받은 상황이다. 하지만 ㄴ씨는 “지원금액이 회사의 손실을 메울 만큼의 양도 아닌데다, 이 돈 역시 이자를 물어야 하는 빚일 뿐”이라고 말했다.

ㄱ사를 비롯한 여러 중소기업들이 연대해 키코 계약의 무효화를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ㄴ씨는 은행들이 “일부 중소기업이 투기 목적으로 필요 이상의 키코 계약을 맺었다”며 화살을 중소기업들에 돌리는 데 대해 분노했다.

“함께 소송을 벌이는 업체 대부분은 한 번도 통화 파생상품 거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눈 한 번 안 팔고 그저 ‘어떻게 하면 제품 잘 만들어 잘 파나’하는 생각만 했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불황에다 원자재 가격까지 급등해서 수익 내기도 어려운 처지라, 키코가 아니어도 중소기업은 다들 힘듭니다. 없는 시간도 쪼개가면서 제품 개발과 생산에 몰두해야 할 사람들이 키코 문제에 시간과 노력을 다 쏟아붓는 것도 억울한 판에, 투기꾼 소리를 듣자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ㄴ씨는 정부가 환율 관련 언급을 자주하는 데 대해서도 비난했다.

“며칠 전 정부에서 ‘외환위기가 끝났다’고 하니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달러 환율이 30원 이상 올라버리더군요. 정부가 환율에 대해 뭐라고 하기만 하면 바로 시장이 불안해져요. 정부는 그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자꾸 떠드는지 모르겠어요. 이쯤 되면 정부가 주기적으로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고의로 그러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예요.”

“키코 이해하는 데 몇달 걸렸어요”

의류업체 ㄷ사가 키코로 인해 입게 된 손실은 10억원 정도로 ㄱ사보다 규모가 작다. 지난해 매출 70억원대, 영업이익 2억원 상당이던 이 회사도 올해는 키코 손실액만큼의 순손실을 예상하고 있다. 사업규모가 작아 피해가 덜한 편이지만, 반대로 작은 유동성 압박조차 이 회사에는 큰 위험이다. 회사는 지난해 은행과 달러 환율 935원을 기준으로 하는 키코 계약을 맺었다. 달러 환율이 980원 아래에서만 움직이면 아무 문제가 없을 계약이었지만, 1500원에 육박하다 현재 1200원대 후반에 머무르고 있다. 이게 문제였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 외환을 사거나 팔 권리(옵션)에 대한 계약인 KIKO에서 그 권리를 행사할 가격을 도출하는 데 동원된 수학 모델. 이 모델은 옵션가격 결정에 널리 쓰이고 있는 블랙·숄스 모델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 ㄹ씨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 내가 정신병 안 걸리고 살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라며 “뭣 모르고 가입당한 키코가 이렇게 날 죽일 줄은 몰랐다”고 푸념했다. ㄹ씨는 은행의 ‘반협박’으로 키코에 가입했다고 했다.

“은행은 우리 회사에 의사 같은 존재입니다. 환자가 의사를 의심하는 거 봤습니까? 그만큼 절대적입니다. 은행이 그렇다고 하면 절대로 믿어왔고, 행여 밉보일까 눈치도 살피고요. 은행이 가입하라고 권유하는데 설마 ‘악마의 상품’을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가입 당시 은행에서 ‘이번에 ㄷ사 대출 연장 조건이 미흡하지만, 이걸 가입하면 잘 해드리겠다’면서 키코 가입서를 내밀었어요. 은행 말 믿고 가입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출이 안되면 끝까지 안되는 거지, 키코 가입하면 된다는 게 수상하기도 했어요.”

ㄷ사는 소규모이지만 해외시장에서 꾸준히 이익을 내온 우량 기업이다. 일정 정도의 달러를 상시 보유하고 있는 회사의 사정을 잘 아는 은행이 이를 이용했을 것으로 ㄹ씨는 보고 있다. ㄹ씨는 지난 5월이 돼서야 키코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환율이 치솟으니까 압박이 시작되더군요. 처음에는 뭣 모르고 가입한 게, 어처구니없이 당한 게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도 못꺼냈어요. 특히 계속 손실 내는 사정이 외부에 퍼져 회사 신용도가 떨어지고, 자금줄이 막힐까봐 겁도 났고요. 그러다 5월쯤 다른 중소기업체들과 함께 대응에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월가에서 그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든 상품 구조를 우리가 어떻게 금방 알겠어요. 키코 이것을 이해하는 데만 몇달 걸렸습니다.”

이 회사는 정부 구제지원금 10억원을 신청했지만, 받은 돈은 2억5000만원. ㄹ씨는 “우리 같은 경우는 당장 1억원만 더 들어와도 숨통이 트일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키코 문제로 회사 안팎이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어느날 팀장이 ‘우리 직원들 관리 좀 잘해야겠다’고 보고합디다. 직원들이 이직 준비를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직원들 앞에서야 ‘우리는 키코 같은 걸로 날아갈 만큼 허술하지 않다.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돌아서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립니다. 다른 업체 사장은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잠적했어요. 주문은 밀려 있는데 결정권자는 없지, 바이어들의 재촉은 빗발치지, 그곳 팀장이 나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하더라고요.”

그는 “하루하루 증발하는 키코 손실액을 환산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일을 도통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키코는 무엇이고 왜 피해 커졌나
특별취재팀/
서의동 경제부 차장, 조찬제 국제부 차장, 김재중 문화부 기자, 장관순 정치부 기자, 송윤경 사회부 기자, 유희진 사회부 기자



환차손 피하기 위한 장외 파생상품

‘위험’ 모른 중소기업만 손실 눈덩이

올 한 해 수출기업들에 공포의 대상이 된 키코(KIKO)는 위험회피 통화옵션 상품이다. 환율이 오르거나 내릴 경우 같은 물건을 수출하고도 손해를 보는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05년 은행들이 수출기업을 상대로 계약을 맺기 시작한 이 상품은 그 위험 때문에 대기업이 거래를 그만두었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중소기업은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연초부터 환율 급등으로 키코 계약을 맺은 중소기업들은 지난 11월 말까지 4조5000억원대의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파생상품은 장내(場內)와 장외(場外) 두 가지로 구분된다. 상품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거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나뉘는 것이다. 장내 파생상품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 판매해야 하고, 증권사가 투자를 권할 때는 일반 투자상담사가 아니라 선물상담사라는 별도의 판매자격이 필요하다. 반면 장외 파생상품은 신고 없이 거래할 수 있고, 금융기관의 일반직원이 판매할 수 있다. 금융감독당국은 상품 판매에 따른 금융기관의 위험만 관리할 뿐 일반투자자의 위험은 관리하지 않는다.

‘사적 계약’에 의한 1 대 1 거래

금융감독원은 국회 정무위원회 신학용 의원(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키코 등 장외 파생상품은 사적 계약에 근거한 당사자간 1 대 1 거래로 별도의 심사절차나 신고서 제도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건별 거래에 대한 보고 절차도 없고 전체 거래 규모, 건수 및 잔액 등만 보고받는다. 은행과 보험사로부터는 분기별, 증권사로부터는 월간 거래실적만 보고 받을 뿐이다.

금감원의 은행업 감독 업무 시행세칙에는 은행이 장외 파생상품을 거래할 때 거래 상대방에게 거래위험 및 잠재손실 등에 대해 충분히 고지하지 않을 경우 불건전 영업행위(64조)에 해당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또 65조 제6호에는 ①거래 상대방의 재무상황, 거래목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거래 제안 ②거래 상대방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도록 충분한 정보 제공 ③거래 상대방이 거래를 할 수 있는 적법한 권한이 있는 계약 체결 전 점검 등을 유의사항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미흡한 규제에 감독당국의 늑장 대응

은행들이 이런 미흡한 규정이나마 제대로 지키고 당국이 감독에 나섰다면 피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키코 문제가 언론에 의해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3월25일 장외 파생상품 관련 유의사항 공문을 보낸 뒤 6월 말에야 파생상품 정보 집중 및 공유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키코 거래은행에 대한 조사는 지난 8월21일에서야 시작했다.

정석현 키코피해대책위원장은 지난 11월1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금융파생상품 관리 및 정책과제’ 공청회에서 키코 사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키코는 한국의 장래 환율 급상승을 예견하고, 파생상품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국내 수출 우량중소기업을 판매목표로 삼아 공격해온 상품이다. 당시 (미국 투자은행이) 국내의 금융감독당국이 신고나 허가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은 허점까지 파악하고, 국내 은행에는 간단히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구실을 줘 적극적인 판촉활동을 하도록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은행은 수수료만을 챙기는 중개자 역할에 지나지 않는 상품이므로 자기의 오랜 고객인 주거래 기업의 보호를 위해 기업이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지도해야 함에도, 파생상품의 전문지식이 없는 일선 지점 직원들에게 판촉활동을 하도록 해 기업의 피해는 물론 막대한 외화유출까지 초래했다.”

자통법 시행 때 ‘제2의 키코 사태’ 우려

내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이 시행되면 키코 외에도 다양한 장외 파생상품이 만들어져 시장에 나오게 된다. 자통법에서는 파생상품의 기반이 되는 기초자산의 범위를 증권, 통화, 일반상품 등에서 재해 및 재난, 범죄발생률, 날씨 등으로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또 지난 4월 자본시장 및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고쳐 장외 파생상품에 대해 ‘헤지(위험회피) 목적’이라면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일반투자자와 거래할 수 있도록 했고, 장외 파생상품을 발행하는 증권사 등의 영업용 순자본비율을 300% 이상에서 200% 이상으로 완화했다.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는 장외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기준을 크게 낮춰준 것이다.

키코 사태가 사회문제로 불거지면서 비판이 쏟아지자 금융당국은 지난 21일 몇가지 개선안을 뒤늦게 내놨다. 금융위원회가 마련한 ‘파생상품 시장 감독체계 개선안’에 따르면 상장기업이나 투자적격법인이라도 장외 파생상품을 거래할 경우 일반투자자로 분류해 투자자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헤지 목적으로 거래하더라도 과도한 헤지를 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하는 장외 파생상품은 금융투자협회가 자율심사하도록 맡겨 금융당국의 규제 대상 바깥에 두도록 했다. 이처럼 규제를 풀어놨기 때문에 ‘제2의 키코 사태’가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전국금융산업노조 정명희 정책부장은 “자통법이 시행되면 다양한 변형 파생상품들이 쏟아질 텐데 이의 위험성에 대한 판단을 민간에게 맡겨두고 사후감독만 하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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