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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

미국도 IMF도 일본도 각성… ‘신자유’ 무너졌나

지난해 9월 전 세계에 몰아친 금융위기는 공고하던 신자유주의 체제에도 균열을 냈다. ‘시장만능’을 외치는 목소리가 잦아든 대신, ‘규제 강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던 서방 선진국 정상들은 머리를 맞대고 규제방안을 논의해야 했다. ‘규제 철폐’를 소리높여 주장하던 전문가들은 ‘반성문’을 제출했다.

사진 왼쪽부터 조지 W 부시 전 미국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총리, 앨런 그린스펀 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그러나 금융위기 1년을 맞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일부의 예상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시장에 대한 ‘반성’과 ‘질타’가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까지는 ‘구호’에 불과하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역풍’이 불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개혁 시도는 정부에 대한 지지율을 하락시켰다. 추락했던 경제지표가 조금씩 상승하면서 ‘시장에 대한 맹신’ 역시 되살아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장의 패배 인정한 G20·다보스 포럼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G20 정상회의를 마친 각국 정상들은 ‘금융시장 규제·감독을 강화하고 경기부양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시장에 규제를 가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 금융관리시스템을 새로 만들고 경기침체에 공동 대응한다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정상들은 선언문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과 금융안정화포럼(FSF) 등 금융관리기구들을 개혁해 시장 감독을 강화하고 △거대 금융회사와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 기준을 만들어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며 △각국 금융관리 당국의 상시적 공조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여전히 “자유시장과 자본주의만이 성장으로 가는 길”이라는 입장을 고집했지만 유럽과 개도국들의 강력한 규제 강화론에 밀렸다.

G20 정상들은 올해 4월2일 영국 런던에서 다시 모였다. 이들은 회의를 마친 뒤 지난해의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구체적인 ‘규제방안’을 내놓았다. 먼저 전 세계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헤지펀드에 대해 처음으로 세계적 차원의 규제를 가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조세 회피 지역을 찾아다니는 ‘검은돈’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기로 합의했고 금융기업의 과도한 보수체계가 금융시장의 위험을 키워왔다는 판단 아래 최고경영진의 급여도 통제하기로 했다.

제2차 G20 정상회의에 앞서 1월28일부터 2월1일까지 열린 ‘서방 선진국들의 클럽’ 다보스 포럼에서도 ‘시장에 대한 규제’가 논의됐다. 토론에 참석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시장의 자정기능 과신’을 꼽았다. ‘시장 규제를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토론자들은 “금융시장을 작동시키는 시장기능을 바로잡으려면 3∼5년은 걸릴 듯하다”며 “미래의 은행은 레버리지 등에서 적절한 규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줄어드는 미국의 목소리

경제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이끌던 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 국가들의 위상은 추락했다. 경제위기의 진원지이자 피해자인 G8은 위기를 타개할 능력도, 자격도 없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결정은 누가 회의에 참여하느냐는 것이었다”며 “G8도, G13도 아닌 G20였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G20 순회의장국을 맡은 브라질의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G8은 친목단체가 됐다”며 “G20 없이 정치·경제적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상회의 진행에서도 미국의 목소리는 먹히지 않았다. 미국은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규제 강화보다는 경기부양에 무게를 두고 싶어했다. 자본시장에 대해 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의 재정지출 확대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고 각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은 재정지출보다는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회의 결과 재정지출 확대보다는 규제 강화에 무게가 실렸다.

IMF 등 미국과 선진국 주도의 세계 경제기구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그동안 미국은 IMF 내에서 17%가량의 발언권을 가지면서 유일하게 핵심 사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였다. 회담에서는 IMF의 구조와 기능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 신흥국들의 입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IMF의 서방편향적인 의사결정구조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도 “세계은행과 IMF는 지난 60여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대표를 나눠 갖는 암묵적인 형태로 전 세계 금융질서를 좌우해 왔다”며 “다음 세계은행 총재가 미국인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IMF 총재 역시 유럽에서 인선돼야 할 까닭이 없다”고 말했다.

회담에서는 2011년까지 IMF의 의결권을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의결권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미국의 지분은 점차 줄어들고 중국 등 신흥경제국의 지분은 증가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IMF 총재와 세계은행 총재 선출 방식도 전환키로 했다. 기존에 유럽과 미국에서 IMF 총재와 세계은행 총재를 나누어 가지던 방식에서 공개적 절차를 통해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대가들의 고해성사

2007년 8월 영국 총리직에 오른 고든 브라운은 전임자인 토니 블레어 밑에서 10여년간 재무장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영국의 가디언은 미국처럼 영국에서도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위기에 빠진 것은 브라운의 책임이라고 비판했다. 야당인 보수당은 금융위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노동당 정부를 향해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브라운은 지난 3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블레어 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재임할 때) 금융시장을 보다 더 강력히 규제·관리하지 않은 사실”에 유감을 표해야 했다. 그는 “아마도 1990년대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지나간 뒤, 우리는 더 강력한 시장 감독을 실시했어야 했다”며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는 과거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시장의 문제를 알면서도 제대로 규제하지 않아 위기를 자초했다’는 고해성사나 다름없다. 브라운 총리는 이어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신념은 종말을 맞이했다”며 “무엇보다 강력한 금융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MF도 ‘반성문’을 썼다. IMF는 지난 3월 내놓은 ‘위기로부터 얻은 교훈’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금융위기 가능성을 제때에 알리지 못했다며 자성했다. IMF는 보고서에서 “통제되지 않은 감시체계와 효과적이지 못한 메시지가 맞물리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호황속에 내재된 위험을 제때 알리지 못했다”며 “결국 세계 경제가 수십년 만에 침체를 겪게 됐다”고 지적했다. IMF는 “IMF를 포함한 세계의 주요 시장 감독기구들이 각국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들이 모호하면서도 산만해 금융위기의 조기 진화에 실패했다”며 “이 같은 실수 재발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의 최고 의사결정자들이 구속력 있는 포럼을 창설해 세계 경제의 위험 요인을 짚어내는 한편 국경을 넘어 이뤄지는 금융 거래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8년 이상 ‘세계 경제대통령’ 소리를 들어왔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주택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또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잭 웰치도 지난 3월1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주주 가치는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아이디어”라며 자본주의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벽에 부딪힌 오바마 분배개혁… ‘신자유’ 살아나나

 


G8 정상들의 탈을 쓴 시위대가 지난 7월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임신부 복장을 한 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G8 국가들의 해외원조 약속 등이 구호에만 그치고 있다며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했다. 로마|AP연합뉴스




시장을 배신한 국유화와 구제금융

금융위기가 터지자 미국은 먼저 중앙은행을 앞세워 유동성 공급과 금리 인하를 시작했다. 단기간에 신용경색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효과가 신통치 않자 다시 은행 간 인수·합병을 지원하고 은행 부실을 직접 구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직접 구제의 정점은 은행 국유화였다. 미국은 올 7월27일 지속적인 위기설에 시달려온 씨티그룹의 우선주 36%를 보통주로 전환하는 방식에 합의, 사실상 이를 국유화했다. 미 최대 보험사인 AIG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구제금융을 받아 사실상 국유화됐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국책 모기지업체 패니매·프레디맥도 수백억달러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


유럽은 미국보다 한 발 먼저 시작했다. 영국은 지난해 10월 500억파운드를 투입해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스탠더드차터드 등 8개 주요 은행을 부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올 2월에도 부실이 늘어나자 추가 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국가 전체가 부도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최대 은행인 카우프싱을 비롯해 란즈방키·글리트니르 등 상위 3대 은행을 국유화했고 스웨덴 정부는 지난해 11월 북유럽지역 최대 투자은행인 카네기은행을 국유화했다.

제조업체에도 대규모 구제금융이 실시됐다. 지난 6월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채권단은 272억달러에 달하는 채무를 탕감하는 대신 10%의 지분을 갖고 차후에 주식 15%를 추가로 매입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500억달러에 이르는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하고 전체 지분의 72.5%를 보유하게 되면서 GM은 사실상 국영기업이 됐다. 나머지 지분 17.5%는 미국 자동차 노조인 UAW의 퇴직자 건강보험기금인 VEBA로 돌아갔다. 이런 조치들은 모두 시장의 힘을 믿는 신자유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들이었다.



일본 유권자들의 ‘각성’

일본의 유권자들은 8·30 총선에서 54년 만에 민주당을 선택했다. 사실상 전후(戰後) 최초의 정권교체였다. 집권당이던 자민당의 의석은 300석에서 119석으로 줄어들었다.


선거를 통한 자민당에 대한 ‘심판’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거부의사’로도 해석될 수 있다. 2005년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는 우정분야 민영화 등 각종 신자유주의 조치를 내걸어 승리했다. 이 선거에서 여당은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가 내건 신자유주의 정책은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왔다. 소득·도농간 격차 확대, 비정규직 양산 및 고용불안, 연간 2200억엔의 사회보장 축소 등 구조개혁의 문제점은 지난해 가을 이후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기불황 여파를 타고 자민당 지지층은 물론 무당파 유권자의 이탈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아소 다로 총리는 지난 18일 선거공고 첫 유세부터 “지나친 시장원리주의로 도농간 격차가 발생했다”면서 ‘사죄’를 되풀이해야 했다.


반면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선거기간 내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창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토야마 대표는 지난달 27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에 기고한 글 ‘일본을 위한 새로운 길’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시장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다”며 “지금 직면한 과제는 우리의 삶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규제되지 않는 시장근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어떻게 끝낼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해서도 다른 목소리를 냈다. 하토야마는 “(나의 핵심 정치철학인)우애는 환경과 같은 비경제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으며 과도하게 진행된 세계화를 바로잡고,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지역 공동체를 되살리는 것”이라면서 “우애의 원칙에 따라 농업, 환경, 의료와 같이 인간의 삶과 직결된 분야는 세계화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며 세계화의 이름으로 그동안 내팽개쳐졌던 공동체 회복, 복지와 의료체계 정비, 양질의 교육·보육서비스 제공, 빈부격차 해소 등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우애의 정신에서 나온 또 다른 목표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도 제시했다. 하토야마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안보협약은 계속 일본 외교정책의 핵심이 될 것이지만, 동시에 일본의 기본적 존재 영역은 동아시아라는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위기와 이라크전쟁 실패 등을 볼 때 미국식의 세계화는 이미 끝났으며 중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면서 “이런 과정에서 어떻게 정치·경제적 독립을 추구할 것인지는 일본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중·소 국가들도 가진 과제”라고 말했다.



아직 견고한 신자유주의 기둥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과도한 경쟁이 초래하는 양극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다.

미국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면 의료혜택도 받기 힘들다. 정부에서 노인과 극빈층을 구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4000만명 이상의 국민이 의료보험제도 밖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병이 나거나 다치면 바로 극빈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정권교체를 이뤄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경쟁’보다 ‘분배’를 경제정책의 기조로 내걸었다. 금융위기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오바마 정부는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료보험에 손을 댔다. 의료보험 개혁에만 향후 10년 동안 6340억달러를 투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재원은 중산층 이상의 세금을 올려 충당하기로 했다.


러나 분배를 위한 개혁은 시작부터 엄청난 벽에 부딪히고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장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 도처에서 반대 시위가 열렸다. 심지어 오바마를 ‘사회주의자’, 더 나아가 ‘히틀러’에 비유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이 때문에 출범 초기 70%에 육박했던 오바마의 지지율은 40%대까지 추락했다.

지난 7월31일 미국 하원 에너지통상위원회는 의료보험개혁안을 찬성 31, 반대 28로 간신히 통과시켰다. 공화당원들은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당내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당초 법안의 개혁적 성격을 약간 수정했지만 민주당내 보수파인 이른바 ‘블루독’ 의원 5명도 반대했다. 새로운 의료보험제도 출범은 당초 예정됐던 올해 10월에서 기약없이 늦어지고 있다. 오바마가 계획했던 법안대로 처리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신자유주의?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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