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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경제평론가

ㆍ강대국 이익 앞에 멈춰선 새 통화체제 만들기 지역통화로 극복하라
 


한 여성이 지난달 24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한 철교 아래 쌓여 있는 중고품들 사이에 앉아 있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세계금융위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있다. 베오그라드 | AP연합뉴스



G20의 어정쩡한 결과

경향신문의 ‘신자유주의 시리즈’에서 나는 현재의 금융위기를 “3중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파생상품 규제, 시장만능론의 폐기와 새로운 경제이론(예컨대 칼 폴라니에 입각한 경제이론), 글로벌 불균형의 제도적 시정을 해법으로 제시했다(1월12일자 참조). 지난 4월 기대를 모았던 주요 20개국(G20)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껏 조세천국의 규제와 헤지펀드의 감독, 특별인출권(SDR)의 확대와 국제통화기금(IMF) 강화, 5조달러 규모의 경제부양을 약속했을 뿐이다.

영국 브라운 총리,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포스트 브레턴우즈 체제를 내걸었고 G20 회의를 앞두고 3월에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 총재가 SDR 초국가 준비통화론(SDR로 기축통화를 삼자는 것)을 제시한 것은 사실 포스트 브레턴우즈 체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반면 오바마·가이트너는 선거 기간 중에 그리고 취임사에서 중국이 환율을 조작했기 때문에 현재의 글로벌 불균형이 야기됐다고 주장해 격렬한 대립을 예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시뇨리지의 이익을, 중국은 수출주도 성장의 이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피하려 했다. 양국은 결국 SDR 확대로 미봉했고 흑자국의 재정확대 정책과 미국의 저축률 상승 등으로 정책 공조를 약속한 셈이다.

물론 전 세계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 공급(통화주의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의 말대로)과 재정 확대(케인스의 말대로)를 동시에 신속하게 실시한 사례는 없다.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 등 ‘돌팔이 처방’(조지프 스티글리츠)을 강요한 것과는 정반대다. 1980년대 후반 워싱턴 컨센서스가 확립되면서 IMF는 협약을 개정해 구조조정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으며 그 결과 IMF 조건을 받아들인 나라는 예외없이 심각한 국내 위기를 겪었다.

미국 스스로 위기를 당하자 미 정부는 정반대의 ‘위선적’(스티글리츠) 정책으로, 즉 대량 수혈로 최악의 사태를 막은 것이다. 또한 중국의 주장을 따라 IMF가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SDR를 확대한 것도 문제를 약간 덜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흑자국들이 미국 재무부 증권을 IMF 채권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이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는 의결권(심지어 미국은 사실상의 거부권도 가지고 있다) 역시 어느 정도 조정될 예정이다. 그동안 IMF가 고금리와 긴축재정을 통한 구조조정을 강요해 결국 선진국의 금융대자본가들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반영해 온 것도 어느 정도는 시정될지 모른다. 스티글리츠는 IMF가 각국 재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의 견해만 반영하는 것도 고쳐야 하며 IMF의 경제학자들이 온통 시장만능론자로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금융자본의 이익만 반영하는 이들이 밀실에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후진국의 이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G20에서는 통화체제 개혁은 물론 이런 거버넌스 문제에도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스티글리츠의 “국제통화 개혁”이나 데이빗슨의 “국제통화청산단위(International Money Clearing Unit)”와 같은 케인스주의 구상이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위기 상황은 언젠가 다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금융 불안정성 때문에 더욱 많은 외환보유액을 쌓은 나라들이 자신의 자산이 달러 가치 하락으로 반토막 나는 것을 눈 뜨고 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구상이 채택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이들 개혁안이 자본시장의 통제와 고정환율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월 스트리트의 금융자본이 지난 20여년 마음껏 누린 투기적 이익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기실 루스벨트가 1929년 대공황이 잠깐 진정된 뒤(이후 3년간 5번의 주가 급등이 있었다) 32년에 은행 파산으로 악화된 이후에 뉴딜을 들고 나온 것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금융대자본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바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루스벨트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 기축통화를 확정하는 것이었던 데 비해 이번의 개혁은 기축통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케인스 때의 영국 정치가들이 그랬듯 미국 대통령이 선뜻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속수무책, 아무 일도 못하는 건 아니다. 80년대 플라자협정이나 루브르협정과 같은 국제공조(실상은 환율 전쟁과 금리 전쟁 속에서 일본이 굴복한 것이다)의 움직임과 함께 지역화(regionalization)의 경향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총리가 될 것이 확실한 하토야마는 최근의 기고문에서 미국식 세계화를 거부하고 AMF-아쿠(ACU, Asian Current Unit)에 의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뜻을 밝혔다. 이는 저우샤오촨 총재의 제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금융위기를 계기로 강화된 치앙마이협약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는 제안이다.

케인스나 스티글리츠 역시 각국의 이해가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현실을 반영하여 새로운 통화체제에 찬성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회원제 형식으로 시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행히 중국-일본-한국-아세안은 서로 물고 물리면서 경상수지가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지 않다. 만일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의 이익을 기초로, 그 무엇보다 금융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케인스형 지역통화체제를 만든다면 이미 비슷한 제안을 한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솔깃해할 것이다.

달러-ACU-유로의 삼각 바스켓에 의한 환율 조정, 그리고 과감한 자본통제와 금융규제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또한 전 세계가 동시에 상당한 비율의 토빈세와 케인스세(증권거래세) 및 탄소세를 부과하고 그 수입으로 지구온난화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즉 글로벌 공공재를 공급하는 데 사용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미국과 금융자본이 끝까지 기득권을 주장한다면 아시아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 칼 폴라니(1886~1964) : 헝가리 출신의 유대계 경제학자로 1944년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이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는 “시장경제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했다.

■ 포스트 브레턴우즈 체제 : 2차 세계대전 이후 정립된 국제통화기금(IMF) 중심의 브레턴우즈 체제를 개혁하자는 것. 브레턴우즈 체제는 2차 대전 이후 혼란스러웠던 각국의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국제통화제도.

■ 시뇨리지 : 국가가 화폐 발행으로 얻게 되는 이득. 주로 미국이 세계 기축통화 발행국으로서 챙기는 화폐 발행 수익을 일컫는다.

■ 워싱턴 컨센서스 : 1990년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가 남미 국가들의 경제위기 해법으로 제시한 세제 개혁, 무역·투자 자유화, 탈규제화 등 10가지 정책으로 미국식 시장경제체제가 주요 골자다.

■ 국제통화청산단위 : 최종 지불 청산이 국내 통화를 통해 중앙은행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세계적 범위로 확대한 것. 즉 각국의 중앙은행만이 보유하는 국제청산통화의 태환성을 세계은행이 보장하는 방식이다. 달러체제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 치앙마이협약 : 2000년 5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세안(ASEAN)+3 재무장관회의’ 때 합의된 역내자금지원제도.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개별 국가 차원으로 현 국제금융시장의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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