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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

ㆍ자본가에겐 천국의 문, 빈곤 세계화 첨병
 

인도네시아 시위대가 지난 6월8일 수도 자카르타의 무역부 앞에서
세계무역기구와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카르타 | AFP연합뉴스



세계적으로 ‘대유행’ 단계에 들어선 신종플루를 일컬어 ‘나프타플루’라고도 한다. 나프타(NAFTA), 곧 북미자유무역협정으로 각종 공중위생, 환경규제가 느슨해진 것을 틈타 미국계 농기업이 멕시코에 축산공장을 이전하였고, 여기가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 곧 신종플루의 발생지가 되었음을 빗댄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훨씬 엄격해진 나프타의 지적재산권 조항을 통해 미국계를 비롯한 초국적 제약회사가 신종플루를 통해 떼돈을 번다.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을 일컬어 ‘트리니티’ 삼위일체라 부른다. 성스러워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기 어렵다. 이 중 WTO는 삼위일체 중 으뜸이다. 그러나 WTO는 우리 농민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빈자들에게 성스럽기는커녕 지옥의 부름이다. WTO가 생긴 이래 전 세계의 양극화는 훨씬 심화되었다. 모든 것을 돈벌이, 곧 교역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무역관련(trade-related)’란 개념으로 말이다. 세상에 무역과 무관한 것이 뭐가 있나. 신종플루 때문에 타미플루 교역량이 증가하면 그것이 바로 자유무역이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차별도, 어떤 규제도 없어야 한다. 신종플루 백신이 절대부족해도 정부는 함부로 그 특허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이란 ‘보호주의’가 엉뚱하게도 WTO에 들어가면서 지재권은 신성불가침이 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무역 관련 투자조치협정(TRIMS)’으로 지상의 ‘투자자’, 곧 자본가에게 천국의 문이 열렸다. 여기에 ‘서비스무역일반협정(GATS)’도 빠지지 않는다. 글로벌 양극화의 첨병이다. 그러나 지금 WTO의 몰골은 초라하다. 미국과 더불어 최근엔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경쟁에 뛰어들면서 할 일이 없다. 되는 일도 없다. 자유무역이란 이름으로 빈곤의 세계화만 키울 따름이다.


초국적 기업에 유리한 통상환경

수출로 먹고산다는 대한민국에서 자유무역은 건드려선 안 될 일종의 성역이다. 그리고 대다수는 자유무역을 여전히 자유롭게 무역하자는 얘기 정도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이른바 자유무역협정문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속셈이 딴 데 있다는 걸 말이다. 관세 철폐나 축소만을 위한 그런 고리타분한 자유무역협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비관세장벽’이란 이름으로 서비스산업, 투자금융, 지적재산권, 행정절차 등 온갖 규제와 장벽을 철폐해 자국의 초국적 기업에 유리한 통상환경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유무역은 신자유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다. 공정무역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그러는 한 유의미하다. 여기에는 여러 흐름과 경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소비자운동으로서의 공정 무역

첫째, 소비자운동으로서 공정무역이 있다.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 등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예컨대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제3세계 커피농가와의 직거래를 통해 생산비를 보전해주고, 선진국 소비자들은 좋은 품질의 커피를 마시고 덤으로 윤리적 만족감도 얻는다. 지난 발렌타인데이 때 공정무역 초콜릿이 히트상품이었다니, 무언가 바뀐 세상을 실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것도 아직 걸음마단계이다. 물론 이런 소비자운동만을 놓고 이것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에 대한 대안이며, 또 이를 통해 자유무역의 폐단이 정정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하다.

현재 전 세계 교역량의 0.01% 정도가 공정무역으로 분류된다. 말하자면 양만 놓고 보면 자유무역에 ‘새발의 피’도 안 된다. 그나마 그것도 65%가량이 유럽연합 국가에서 소비된다. 그래서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가 지속가능 개발에 있어 공정무역, 특히 정부를 비롯한 지자체의 공공조달에서 공정무역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진전이라 하겠다. 이는 한국 공정무역 소비자운동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FTA대안으로서의 중남미 PTA

둘째, 베네수엘라, 쿠바,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에서 현재 시행 중인 ‘민중형 무역협정(PTA)’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지 부시 미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곧 신자유주의 지역통합에 대한 대안적 지역통합전략으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추진한 ALBA, 즉 ‘볼리바리안 아메리카 연합’ 구상의 일환이기도 하다. PTA 역시 회원국 간 관세·비관세 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과 운영방식은 신자유주의 FTA와 비교해 하늘과 땅 차이다. FTA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면, PTA는 회원국 주민의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 목표이다.

예컨대 산유국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그 가격만큼 쿠바의 공공의료 서비스가 교환되는 교역방식이다. 쿠바의 안과 기술이 세계 수준인 만큼 베네수엘라 주민은 무료로 백내장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통상이 단순 돈벌이 수단만이 아니라, 정부의 공공서비스 향상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분명 세계경제사에 새로운 시도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안적 지역통합 및 발전전략은 중남미라고 하는 공통의 역사적 배경, 식민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라고 하는 구체적인 동력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미국의 깨달음’ 신통상법

공정무역과 관련된 세번째 가시적인 흐름은 미국의 신통상법이다.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미국형 FTA의 본 고장에서 등장한 공정무역의 새로운 경향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미국의 통상규범과 체계가 대체로 세계통상규범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미국 통상법상에서 ‘공정무역’이란 개념은 이미 1980년대 레이건 시절부터 사용되어 왔다. 대개 상대국의 각종 규제장벽을 해체하기 위해 동원된 말이었다. 하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 10년을 전후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의 결과 얻은 것은 없고 자기 일자리는 사라졌다는 점에 대한 대중적 공감이 확산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오바마도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공정무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아직도 FTA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우리 실정에서 보자면 그래서 미국은 ‘선진적’이다.

미국의 공정무역론은 한·미 FTA라는 구체적 맥락에서 보면 사실상 미국 자동차의 의무구매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고전적 보호주의가 이 경우 미 자동차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공정무역은 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통상정책이 동원된다는 차이를 보인다.

아무튼 이번 회기의 신통상법은 약 110명의 의원이 발의자로 서명한 가운데 이전 회기보다 훨씬 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법안 내용만 놓고 본다면 아주 혁신적인 내용도 포함한다. 기존의 모든 FTA를 재심의해 재협상한다든지, 저 악명높은 투자자-정부소송제와 네거티브 리스트를 배제한다든지, 식품 안전과 소비자 보호를 대폭 강화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만일 원안대로 법안이 이번 회기에 통과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한·미 FTA를 비롯해 WTO 체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임이 분명하다.



정당성 잃은 자유무역

미국형 혹은 유럽연합의 신모델 FTA를 통해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은 신성한 것도, 변경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안의 실현 가능성은 지금의 소매상형 공정무역이 정부 조달 시장에 도달할 정도로 성장하고, ALBA형 지역통합전략의 안정성이 검증되고, 미국 신통상법의 의회 통과 여부와 연동되어 있다고 하겠다.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은 이미 그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이며, 그 효율성 역시 지난 경제위기 과정에서 보듯 의문시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특성상 미래의 발전전략은 새로운 통상전략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제는 ‘새로운 사고’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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