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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4일, 한 해군 대위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민간인 친구에게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고, 자살 다음날 바로 상관인 대령은 준강간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해군의 대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고 거침이 없다.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하면 해군의 신속한 대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보도에 따르면 자살한 대위가 발견된 경위는 ‘연락이 끊긴 채 출근을 하지 않아 동료들이 대위의 집을 찾아갔다가’이다. 단순히 연락이 안되고 출근하지 않는다고 ‘동료들’이 집까지 찾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상식적이지 않다. 유서도 없었는데 민간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얘기만으로 가해자를 특정하고 단 7시간 만에 긴급 체포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대령이 만취상태로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했다지만 체포 하루 반나절 만에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속도전적 해결이다.
 
그동안 수많은 군대 내 성폭력 및 자살·사망사건들에서 축소·은폐·조작을 위한 조직적 시도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런 대응들은 이상하고 낯설다. 뭔가 숨겨진 얘기가 훨씬 많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 해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과 처벌’이 아니라고 느낀다. 대위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철저한 조사가 먼저다.
 
2016년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여군 대상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육군’은 총 111명이고 대부분 계급과 서열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이었음에도 실형 선고는 7명(5.9%)에 그쳤다. 2014년 발표된 홍일표 의원의 자료에서도 실형은 5%에 불과했다. ‘강력한 처벌’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제대로 처벌받는 사례는 드문 것이다.
 
상명하복의 강력한 권위적, 위계적인 구조, 폐쇄적인 조직문화, 여성군인을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여기는 젠더화된 위계질서는 군대 내 성폭력의 원인이자 동시에 군대 내 성폭력을 축소·은폐·조작하는 메커니즘이다. 피우진 보훈처장 내정자의 경험담과 2013년 육군 대위 자살사건 등 수많은 성폭력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2014년 발표된 ‘군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성적 괴롭힘이 밝혀졌을 때 피해자는 집단 따돌림(35.3%), 가해자나 부대 내 선임 혹은 상관에 의한 보복(각 23.5%), 전출(17.7%) 등의 불이익을 받았고, 불이익을 받지 않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피해 시 남성군인은 97.4%가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여군은 단 10.0%만이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런 현실에서 군대 내 시스템만으로 군대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고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이 아니라 ‘인권 관점의 충분하고 철저한 조사’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인권위, 국회,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조사를 요구한다. 특별조사에는 종결된 성폭력사건에 대해서도 철저한 검증과 재조사를 포함할 것을 제안한다. 또 다른 ‘ㄱ대위’가 생기지 않도록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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