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
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
시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 이틀 뒤였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원 최강서가 자살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한국외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이 이어졌다. 왜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자살했을까? 노동자들 죽음의 행렬을 초래할 만큼 선거가 중요했나? 하지만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그 어떤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선거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국면에서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폐지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
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은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소양에 관한 얘기는 그가 정계 입문한 18년 내내 입방아에 올랐다. 박근혜는 늘 짧게 말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동생이 아니라면 아니다”. 간단명료하다.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였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선 정책 현안을 묻는 문재인의 질문에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선 ‘경제회생론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계속되자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예요”라고 했다. 본질인 정책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그간 보여준 행적과 언행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은 전무했다. “대통..
올가을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100만, 200만명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와 근 두 달 동안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프랑스 남쪽 님(Nimes)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를 외쳤던 신화를 떠올리게 하였으니, 만인의 입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2016년 12월9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어떻게 기록할까? 돌이켜보면, 4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는 좀 이상했다. TV토론에 나와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후 새누리당 친박근혜계와 비박근혜계 간 내부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친박계는 그제 심야에 급히 모여 ‘혁신과 통합보수연합’ 모임을 결성하더니 연일 비박계를 공격하고 있다. 어제는 친박계 이장우 최고위원이 나서 김무성·유승민 의원의 과거 발언을 끄집어내 인신공격을 했다. “배신과 배반의 아이콘인 김 전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는 한마디로 적반하장·후안무치”라고 말했다. 온갖 전횡으로 당을 망쳐놓고도 도리어 큰소리를 치니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박 대통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것은 친박이나 비박 모두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 무게로 따지자면 친박의 책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무겁다. 친박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공범이다. 사전에 국정농단을 막지 못했으면 사후 시정에라도..
촛불혁명,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혁명은 체제(시스템)의 교체를 의미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탄핵이 된 것도 아니고 박근혜·최순실을 만든 시스템도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서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빠르다. 아직은 혁명이 아니다. 물론 탄핵소추가 성사된 것은 시민의 승리이다. 그러나 지금의 승리는 견고하지 못하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시스템의 교체는커녕 정권교체도 이루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1987년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87년 6월 100만명이 거리에서 최루탄과 맞서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이 나온 후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여당과 야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8인회의’라는..
눈물에는 여러 가지 눈물이 있다. 기쁨의 눈물, 억울한 눈물, 겁먹은 눈물, 회한의 눈물, 고통의 눈물, 웃음 끝의 눈물, 마지막 숨을 몰아쉰 눈물, 웃픈 눈물, 거짓 눈물….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상황에 맞춰 이름을 짓자고 하면 세상에는 사람들 생김새만큼이나 많은 눈물이 존재할 것이다. 이날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지난 9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날이다. 남보라색 재킷에 회색 바지를 입은 그는 오후 4시53분 청와대 위민1관 영상 국무회의실에 입장해 국무위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대통령 신분’이란 껍데기만 갖게 된 그는 4분54초간 모두발언했고 우리는 TV로 이를 지켜봤다. 이후 TV로는 볼 수 없는 비공개 간담회가 이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자리였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