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양심수를 지원하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촛불’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촛불은 양심수에게는 단순한 스탬프의 그림이 아니라, 불안과 어둠을 밀어내는 ‘희망과 정의’의 상징이다. 지난 ‘촛불혁명’도 폐쇄사회를 청산하고 보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갈구하는 시민들의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적폐척결을 둘러싼 현 정권의 대응을 보면, 촛불정신과 동떨어진 무책임한 자세가 드러나고 있다. 국내 원자력학계 및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내 관계자 간의 연결고리가 인맥 및 학맥으로 굳게 얽혀, 연구항목 및 연구비의 배정까지 핵마피아의 핵심인물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곪을 대로 곪은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진행 중인 ‘재처리와 고속로’ 연구..
두 점 차로 지고 있는 8회말 무사 1·2루. 감독은 타석에 들어선 6번 타자에게 강공 사인을 보냈다. 7번 타자가 미덥지 못해서다. 결국 유격수 땅볼로 더블 플레이가 나오면서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리고 게임도 잃었다. 해설자는 보내기 작전을 왜 안 했냐고 열을 올리지만 무슨 소용이 있나. 야구도 그렇지만 역사에서도 지나간 상황에 대한 가정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굳이 따져보는 것은 그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 전 국정농단 사태가 촉발한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지금쯤 한국은 19대 대통령 선거(12월20일)를 앞두고 뜨겁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정치권의 합종연횡이 정리가 되면서 아마도 여권의 반기문 후보와 야권의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
선거민주주의란 것이 민의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을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더구나 과연 이것이 민주적인가? 민의와 상관없이 그 민의를 대표할 대리인들이 선정되는 것이. 무엇이 저들을 대선후보라고 정했는가? 여론조사? 지지율? 과연 그것이 민의를 얼마나 반영할까? 한국의 정치인 지지율 조사가 얼마나 그릇되고 조작되고 바람몰이용인지는 이미 지난 18대 대선에서 충분히 폭로된 바 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선출된 자들(the elected) 가운데 고르기 게임이다. 즉 ‘자격 갖춘 자들’(the elite) 중에서 고르는 정치게임. 1987년 헌법으로 재개된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다. 내 주권은 선거일과 선거일을 앞둔 얼마 동안만 작동한..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탄핵 찬반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과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이 태극기를 들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계급·지역·이념·종교를 초월해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다. 선열들은 한마음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동단결했다. 꼭 98년이 지난 지금 서울 도심에선 3·1정신과는 정반대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견 3·1절은 둘로 쪼개진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현 시국을 촛불과 태극기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건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촛불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이 헌법질서를 무너뜨린 데 대한 시민의 분노에서 시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 불평등·불공정·불의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폭발시킨 기폭제였을 뿐이다..
1789년 7월11일, 미국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던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런던으로 긴급하게 편지 한 통을 쓴다. 수신인은 이후 프랑스대혁명의 정당성을 치밀하게 논증하는 글인 을 쓰게 되는 토머스 페인이었다. 제퍼슨은 이 편지에서 국민의회가 지금 “낡은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제 새로운 정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는데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 선언”을 정초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바로 이 선언이 1789년 8월에 반포된 그 유명한 프랑스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이후 공화국 프랑스의 구성과 운영의 원리를 정초하는 문서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 대한 비판..
“여자 나이 50부터 황금기야. 손자들 키워달라고 자식들이 매달리기 전까지가 누려볼 수 있는 마지막 자유시간이라니까….” 직장 다니는 딸 대신 손자들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이웃의 선배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 좋다는 ‘여자 나이 50’을 넘기는 2016~2017년, 나는 젊은 날 이후 잊고 지냈던 나의 ‘여성성’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됐다. 나를 ‘50세 고민녀’로 만든 데 불을 댕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해서, 여성으로서 티끌 한 점 뭘 더 누려본 기억이 없는 내가 추운 겨울 박 대통령의 파면을 위해 광화문광장에 촛불을 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까지는 기꺼이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회에서 사회자가 박 대통령을 두고 “잡×”이라고 성별..
“한국이 놀랍다.” 이 말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는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변신한 한국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요즘 듣는 말은 ‘한국인은 놀랍다’이다. 수십만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주말인 토요일에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매번 왜 그렇게 시위를 자주 하는가에 대해 가장 놀란다. 해외 언론들은 그저 놀랍다고 표현했지만 그 놀라움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 얼마나 부패했길래 저렇게 시위를 계속하겠는가라는 놀라움의 의문을 풀기 위해 해외 언론은 더욱 상세한 보도를 이..
정치란 무엇인가? 대학 신입생 때 정치학개론 문제였다. 데모하느라고 결석을 밥 먹듯이 해 수업내용 대신 상식에 기대어 “만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가 낙제점을 받았다. 이후 정치학 박사가 되고 30년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갈등조정의 제도화”라고 답한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들을 국회와 같은 제도의 틀 내에서 조정하는 일이 바로 정치라는 이야기이다. 촛불혁명을 바라보면서 이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최고경쟁력은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이다. 외국 학자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골리앗 투쟁, 촛불, 희망버스 등 우리의 운동을 너무 부러워한다. 그러면 나는 “이 운동들이 자랑거리가 아닐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그렇다. 치열한 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