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기후변화에도 의미 있는 해였다. 온실효과,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같은 용어가 그해 본격적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해 6월23일, 기후변화의 새 역사가 쓰였다. 40대 후반의 한 과학자가 그날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역사적인 증언을 했다.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에 의해 강화된다고 99%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증언은 이튿날 ‘지구온난화는 시작됐다’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기후변화가 언론에 처음 대서특필된 순간이었다. 향후 가열되는 기후변화 논쟁의 예고탄이기도 했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훗날 ‘기후변화 선지자’로 불린 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제임스 핸슨 박사였다. 당시 핸슨 박사가 말한 핵심은 세..
올여름 한반도에 불어닥친 유례없는 폭염은 많은 서민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상 최악의 폭염’이 올해만 유독 불거진 이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최근 5년 동안 매년 한반도 사상 최고기온이 경신되고 있고 최악의 더위는 여름철 늘 있는 대책 없는 단골뉴스가 되는 등 고착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이러한 기온 상승은 기후학자들이 우려하는 예측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폭염은 여름철 며칠만 피하면 괜찮은 것이 아닌 다수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여름 내내 지속되는 자연재해가 된 것이다. 재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쏟아내는 대응은 임기응변의 세금 투입 일색으로, 주변 전체를 생각한다면 폭염을 더욱 심화시키는 대책들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며, 근본적 ..
연일 기록적인 폭염에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가 갈라져 솟아오르는가 하면 베란다에 내다놓은 달걀이 부화되어 병아리가 태어나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가 폭염도 자연재난으로 대처하라”고 했다. 지자체와 정부 기관들도 폭염에 대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예전처럼 “무더위는 이열치열(以熱治熱)로 극복하자!”고 외치기가 무색하다. 정부가 폭염을 자연재난으로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일상적인 생활 속 시민 안전을 외치기 전에 산업현장에 대한 긴급점검을 주문하고 싶다. 특히 발전소, 제철소, 석유화학단지, 유해성 물질 제조공장, 건설현장, 조선소 등 언제든지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는 위험한 국가 기간산업 단지들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노후돼 거미줄처럼 얽..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30도를 넘는 폭염 속에서도 수만명의 조문객이 고인의 삶을 되새기며 애도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 아이의 손을 잡은 가족, 직장인 등 다양한 시민들이 줄지어 선 풍경은 그가 얼마나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추모 열기는 전국의 36곳 분향소를 넘어 베이징, 로스앤젤레스 등 해외 한인사회에도 이어졌다. 손편지·방명록·포스트잇·홈페이지를 통한 추모 메시지가 넘쳐나고, 정의당에는 당원 가입과 후원금 납부가 급증했다고 한다. 고인을 애도한 5일 동안 시민들은 정치인 노회찬의 삶과 꿈을 되새기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빈소와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은 “혼자만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 “노회찬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
일요일 오후, 쇼핑센터의 거대한 주차장에서 빈 공간을 찾기는 어려웠다. 겨우 한 자리를 발견하고 진입하려는데 근처의 주차요원이 방해가 됐다. 손짓을 해도 알아듣지 못해 창문을 내리고 목청을 높이자 그가 내 차 쪽으로 다가왔는데 모습이 심상찮았다. 20대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의 다리는 풀린 듯 휘청거렸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눈동자마저 풀린 듯했다. 차문을 열고 발을 내디딘 순간, 훅 덮쳐오는 뜨겁고 매캐한 열기. 나는 그의 약간 얼빠진 모습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매장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빨라졌지만 발길을 되돌려 그 청년에게 다가갔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고, 또한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는가만, 그냥 못 본 체하며 지나가기가 힘들어서였다. “2시간 일하고 1시간 쉬..
폭염의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소환되는 1994년에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출근시간은 오전 7시였는데, 퇴근시간도 없고, 휴일도 없었다. 내가 맡은 일은 굉장히 다양하고 많았지만 한 단어로 요약하면 심부름이었다. 나는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에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위를 뛰어다니거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늘도 없는 시내 한복판에 내리꽂히던 하얗고 뜨거운 햇빛이 기억난다. 그래도 더웠던 기억은 없다. 기업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 일은 처음이었다.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서 모든 것이 연습 같았다. 나는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마다 정말 좋은 회사에 들어갈 거라고, 못 들어가면 우리라도 ..
흔히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과 같이 많이 쓰이는 것이 ‘가을볕(밭)에는 딸을 내보내고 봄볕(밭)에는 며느리 내보낸다’입니다. 이미 결혼한 며느리는 흉하게 타든 말든 괜찮지만 장차 시집갈 자기 딸은 얼굴 곱게 타야 하니까요. 이렇듯 같은 딸이라도 자기 딸을 더 챙기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 안 갑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배 썩은 것은 딸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가 됩니다. 아들 주느라 온전한 배는 못 줘도 그나마 썩은 부위 도려내면 먹어볼 거 많은 건 딸 줍니다. 하지만 밤 썩은 건 아휴, 먹잘 게 없습니다. 이런 입 챙김에서 손 챙김으로 넘어가면 ‘죽 설거지는 딸 주고 비빔 설거지는 며느리 준다’로, 수고로움에도 차별이 공공연하게 드러납니다. 식구(食口)란 한솥밥 먹는 사이를 말합..
1994년을 배경으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당시 신문을 살펴보았다. 굳이 오래된 기사를 읽어 기억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1994년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아있는 한 해이다. 그해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대만과 우크라이나에서 비행기가 떨어져 수많은 승객들이 목숨을 잃었고, 성수대교 붕괴와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가 있었고, 지존파 사건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팝 가수 커트코베인이 유명을 달리했고, 자살골을 넣은 콜롬비아 축구선수가 12발의 총격을 당해 죽었다. 1994년은 또한 역사적인 폭염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겼다. 그때만 하더라도 좀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에어컨을 설치하고 사는 게 그리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관측소가 생긴 이래로 매일같이 최고기온의 기록을 갈아치우던 그해 여름, 노약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