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박용하(1963~ ) △ 돈 가는 데 사람 간다. 돈 가는 데 시간 간다. 돈 없이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고 하루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과 돈은 어긋나기 마련이라는 말도, 사람 나고 돈 났다거나 돈이 거짓말한다는 말도 다 옛말이다. “애용할 수 있는 것은/ 사고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칼이 그렇고 방아쇠가 그렇고/ 버튼이 그렇고 핸들이 그렇고..
▲ 사과의 조건 사과를 깎는다. 사과를 비롯하여 사과 아닌 곳에서 머무는 사과들이 서로 미끄러진다. 소문이 나돌고 있다. 여러 개의 바구니들이 불확실하게 겹쳐진다. 번개 속으로 들어가 번개를 싫어해요. 밤과 낮이 오지 않는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더 강한 사실이다. 사과들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과들은 쉽게 풀린다. 아직도 사과가 남아 있다고 믿는 손이 홀로 사과를 깎는다. 손의 형상이 나타나면 비로소 손 위에 떠오르는 사과들 사과의 뒤틀린 연산 사과가 들고 있는 없는 지름 - 이수명 (1965~ ) △ 참혹하다. 관계만 남고 대상은 사라진다. 수많은 관계들 때문에 겨우 대상이 생겨났듯이,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매우 의존적이다. 사과 또한 그렇다. 사과가 아닌 것들을 수없이 배반하고 모두 지워내고 ..
▲ 김밥천국에서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기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 권혁웅(1967~) 부분 △ 손쉽게 먹히는 한 ‘끼니’가 되기 위해 ‘멍석말이’에, ‘잘게 토막난’ 채 ‘육시당한 몸’으로 누군가의 깜깜한 뱃속에 들어가 허기를 채..
▲ 여진 수백 개의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나 끊어진 철로처럼 누워 불안한 진동을 감지하는 바닥인가 이 순간 나는 유신론자 아니 유물론자 아니 아무 것도 아니 다만 닥닥 부딪치는 이빨을 소유한 자 그러나 나의 떨림에도 근원은 있다 차가운 내 살 속에도 자갈과 모래처럼, 또 나뭇잎처럼 켜켜이 쌓인 사람들이 있다 지붕 없이 이빨도 없이 새들은 벌써 이곳을 떠나고 뒤틀려 열리지 않는 문짝 속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는 휘어져 버린 시간 당신의 밤은 무사한가 오늘은 기차처럼 몸을 떨고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모든 사물이 제자리로 가기 위해 흔들린다, 는 생각 숨 쉴 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바닥 나무뿌리 같은 ..
▲ 땅멀미 거제 외포항 동남쪽 3마일 지점에서 밤새 출렁거린 어부들이희뿌연 김 속에서 허물어지는 몸을 맞대고후루룩후루룩 돼지 비계를 건져 올린다삶은 해삼처럼 졸아든 헛배가 조금 든든하고잠이 찾아온다살덩이 몇 점 없는 국물인데 이(齒) 사이에 어둑새벽이 낀다바닷가 돈에는 지느러미가 있다국밥집이나 술집이나 언니들의 거웃 사이로 요리조리 헤엄쳐 다니는 지느러미침 퉤 발라서 풀어놓으면 알아서 정든 곳에 가서 깃든다새벽을 쑤시면서 국밥집을 나오면꽃게처럼 알록달록 화장을 하고 이동 커피숍이 길을 가로막는다- 커피 한 잔 얼마지럴- 천 원이에요 배 타고 가시려면 커피 한 잔 하셔야 되어요그 여자 말씨 천 원이면 싸다 생각하며불면(不眠)을 받는다 불면(不眠)이 움찔한다하아, 요즘 육지에 오르면 땅이 이 난장이다땅이 울..
▲ 珉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 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유희경(1979~ ) △ 우연만큼 가연성이 강한 질서가 또 있을까. 막차시간 빽빽한 버스 안이어도 좋고, 낯선 곳에 홀로 여행을 와서 환기되는 어떤 흐느낌이어도 좋다. 옆에 선 여자아이를 가만히 관찰하다 버스 안에서 어깨가 쓸리고 부딪히고, 서로의 입김이 모르는 척 달라붙어 차창이..
▲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괜찬타, 내사 마, 살 만큼 살았데이, 돌아앉아 안경 한 번 쓰윽 닦으시고는 디스 담배 피워 물던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신 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모르핀만, 모르핀만 맞으셨는데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 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 *간성(肝性) 혼수 : 간이 해독 작용을 못해 암환자들이 겪는 발작, 혼수상태. - 전동균(1962~ ) △ 아버지는 어디에서 ..
▲ 돌멩이라는 이름 - 돌멩이에게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나갈 때그가 돌멩이! 부르니돌멩이는 떨어뜨렸다돌멩이답지 않은 것들을 너의 이름을 부르자, 그 자리에 꽃가루처럼 떨어지는 것들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너 그래서 돌멩이의 이름을 지우는 일꽃을 꽃밭에 숨겨두듯이 그래서 돌멩이를 지키는 일이름을 부르면손에 쥐고 싶어지는 마음에 대하여이름에 대답하면위험에 빠지는 일에 대하여 그의 손에서, 돌멩이는 너무 뜨거워지고 너무 차가워지고작은 심장을 멈출 테니 어쩔 수 없이 돌멩이! 부르고 나면내가 한 짓을 고백해야지 -‘돌멩이라는 이름-돌멩이에게’ 부분, 이성미(1967~ ) △ 사라졌던 세계가 다시 시작된 것처럼 아주 놀라운 폭발력으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살아가고 있다.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