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 고두현(1963~ ) △ 쇼펜하우어는 평생 물려받은 재산으로 돈 걱정 없이 살았으나, “돈을 벌 수 있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기에 쓰는 데 신중할 뿐”이라며 돈에 대해 인색했다. 그에게 돈이란 자유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원하면 원할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기에 돈을 기쁨으로 바꿀 줄 모른다면 돈에 바쳐진 인생은..
▲ 날마다 설날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 ‘날마다 설날’ 부분, 김이듬 (1969~ ) △ 언제부터 ‘계획’이라는 말이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약속을 ..
▲ 한 수 위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 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 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 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씨는 괄씨요 마 넌인디 산다먼 내 팔처 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 보이는 돈이 천 원짜리 구지폐 여섯 장이다 -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씨요 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 복효근(1962~ ) 부분 △ 구수한 고향 풍경은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라는 할배의..
▲ 사냥꾼 우리 동네의 사냥꾼은 총도 덫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그는 어느 날 노루를 보았다. 낭떠러지 위, 눈에 홀려 바보처럼 떠돌던 노루를. 그는 온몸을 던져 노루를 껴안고 아래로 굴렀다. 수십길을 깔고 깔리며 바닥에 떨어졌을 때 노루는 그의 몸에 깔려 있었다. 기절한 노루는 한동안 온 동네에 고기 냄새를 풍기게 했지만 알고 보면 노루 동네에서 그가 볼썽사납게 전시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적절히 명예를 지켰으며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 성석제(1960~ ) △ 어떤 고백이 탄생하는 순간은 혁명과도 같아서, 단 하나의 고백 때문에 세계가 다시 지어지고 우주의 질서가 스스로의 감격을 따라 재편성되기도 한다. 나는 오늘 여기서 그런 정념을 단순히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부..
▲ 광화문에서 프리허그를 한국에 가면, 이백만 원 월급 받는 이가 청혼한댔어요. 나보다 스무 살 많은 아저씨, 이백만 원이면 승용차가 있고 기사도 둘 수 있겠지, 생각하고 베트남에서 왔어요. 제 이름은 프엉. 팔 년 됐어요. 일곱 살, 세 살, 오누이 손 잡고 구정엔 고향에 찾아가려 했는데 십팔 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요. 나비처럼 팔랑, 우리 세 식구 저쪽으로 건너가 같이 살 거예요. 가시 많은 이 몸 여기서 벗을래요. 십오만 사천 볼트 전기가 흐른답니다. 삼십 미터 송전탑 거기 사람이 올라가 있습니다. 벌써 두 달째여요. 서커스를 하느냐구요? 억울해서, 억울하고 분해서 알리고 싶었어요. 사람의 꿈을 꾸고 싶은데 턱턱 걸리는 가시 울타리가 무서워요. 겨울 해는 걸음이 빠르지요. 귀신 같은 내가 무서워요...
▲ 비인간적인 밤이 떠돌아 왔습니다. 인간은 헐벗은 몸 어둡고 웅크린 인간의 욕조 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물이 닿은 인간의 발가락 끝부터 쑥빛 비늘이 쑥쑥 돋습니다. 인간은 오랜만에 미끈거리는 감촉에 젖습니다. 인간은 두 다리보다 지느러미에 맞는 생물이야. 인간은 되뇝니다. 인간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인간은 목을 늘립니다. 늘어진 목과 머리는 여럿이 나눠먹을 수 있는 인간의 밥상을 두리번거리며 불어터진 먼지를 쓸고 인간의 욕실까지 흘러갑니다. 흘러온 얼굴이 인간의 지느러미를 따라 움직입니다. 인간은 아가미로 숨 쉬고 숨죽입니다. 인간의 호흡을 잃었구나, 인간. 인간의 표정이 백랍처럼 빛납니다. 인간의 목덜미가 납빛으로 찢어집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어린 인간이 찢어지는 인간 곁으로 와 앉습니다. 어린 인간..
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주워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 김소연(1967~ ) 슬픔이라는 말이 작동하기도 전에 온몸을 찾아오는 느낌을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바깥은 더 깊은 붉음으로 눈물을 길어올리고 있고, 좀처럼 해소가 되지 않는 마음의 질량은 자꾸만 무거워진다. 이렇게 상식..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 김광규(1941∼ ) 부분 시는,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로 이어진다. 문민정부 세대에게 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