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王을 죽인 나 王을 죽인 내가 내 뒤의 무수한 나에게 외친다. “나는 王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王을 죽이지 않았다” 내 뒤에 무수한 내가 웃기 시작한다. 돌멩이 날아오는 대낮에 나는 王의 육체 속으로 도주한다. 王의 육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는 허나 王에게 내 가슴의 젖을 준다. 王의 육체 속은 벌판이다. 냇물도 흐르지 않고 말라붙어 있을 뿐, 그 냇물을 뜯어내면서 나는 벌판에 입술을 댄다. 밖에서 무수한 내가 웃기 시작한다. 벌판에서 나는 하늘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하늘, 하늘, 저 푸른 하늘은 끝끝내 없다. - 이승훈(1942~ ) △ 굳이 무의식이라는 기표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끝을 내가려가고 있는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전복과 수복 사이에서 항복밖에..
▲ 사랑의 동전 한 푼 사랑의 동전 한 푼위대한 나라에 바칠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기쁘게 쓰일 곳은 별로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그대 아름다운 가슴을 꾸밀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바다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 될지라도, 사랑의 동전 한 푼내 맑은 눈물로 눈물로 씻어내 마음의 빈 그릇에 담아당신 앞에 드리리니…… 사랑의 동전 한 푼내 눈물의 곳집 안에 넣을 때,이 세상의 모든 황금보다도사랑의 동전 한 푼더욱 풍성히 풍성하게 쓰이리니……. - 김현승(1913∼1975) △ ‘과부의 동전 한 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가 개작한 시다. 어느 과부가 제 가진 전부였던 엽전 두 푼을 하나님께 바치자 예수께서 이르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
▲ 이력서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오은 (1982~ ) △ 기형도가 ‘오래된 서적’에서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라고 직관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출생이라는 사건 이외에 어떤..
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노기 띤 음성으로음, 돈이 있어야 하네 돈이, 하셨다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내게 돈 이야기 하시지 않았다자신도 죽을 때까지 방 한칸 없어셋째딸네 집에서 여섯 달 누웠다 가셨다가끔 욕창이 난 등 긁어주고손 다리 주물러드리면 마냥 행복해하셨다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에봉분 없이 깨끗이 묻히셨다십수년이 흘러 나는 아직도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전문 시위꾼으로 집회현장을 쫓아다니지만가끔 그의 어조로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이젠 장인어른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송경동(1967~ ) 부분 △ ‘삶과 시’ 하면 그 시는 있어 보이고 ‘일상과 시’ 해도 좀 있을 ..
▲ 눈보라의 끝 구름의 그림자 연기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때 당신을 배우려고 먼 바다를 건너왔어요 텅 빈 고층 빌딩들이 밤을 견디듯이 층계로 쏟아지는 유리구슬들 얼굴을 참는 얼굴 고백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핏속에서 사라지는 긴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있는 골목 손바닥들 서로의 세포에 대고 속삭인다 손등이 가려워요 파도를 끌어와 무릎을 덮을 때 조용한 사람과 더 조용한 사람이 동시에 입을 떼는 순간 - 백은선 (1987~ ) △ 느낌이나 상황 같은 모호한 순간이 다시 모호한 순간으로 교환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시가 될 수 있을까. 눈보라가 치는 순간을 바라보던 시인은 눈이 내리는 풍경이나 눈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구슬이 쏟아지는 상황이나 핏속에서 사라지는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있는 골목들을 떠..
▲ 가방 멘 사람 나 젊어서 회사 다닐 때우리 선생님 이따금씩 가방 메고 오셨지 중학교 시절 담임을 하셨는데 풍을 맞고있는 재산 다 날리고는 커다란 가방 메고 다니셨지 처음에는 문학전집이나 백과사전을 가지고 다니시다가몇해 지나면서 양말이나 은단을나중에는 빈 가방 메고 다니셨지 한쪽 발을 끌며 먼 세상 걸어다니셨지 비 오다 그치고여기저기 전깃불이 들어오는 저녁커다란 가방 메고 가는 사람 보니우리 선생님 생각난다 - 이상국(1946~ ) △ 어릴 적 미제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가가호호를 방문하곤 했다. 시골에서 특산품을 이고 지고 메고 왔던 시골아줌마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세일즈맨들, 외판원, 방판원(방문판매원), 잡상인, 보따리 장사라 부른다. 나도 이 가방 ..
▲ 동경(銅鏡)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1972~ ) △ 시는 언어 속에 내장된 사유가 좀 더 극단적으로 외침이 된 형태이다...
▲ 내 인생의 브레이크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운수회사에 찾아갔어12톤 트럭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면제법 돈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나이는 몇이냐결혼은 했느냐아이는 있느냐사장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나니25톤 트럭은 영 못 몰 거라네마누라 있고 애도 있고 해서 버는 김에확 벌어야겠는데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더니거저 180은 밟아줘야 수지가 맞는데조심성이 생겨서 그럴 수야 있겠는가100만 넘어도 발바닥이 올라가니처자식이 브레이크야, 브레이크이러더구먼지금은 5톤 트럭 몰고가까운 데나 조심조심 왔다 갔다하고 있지 - 하상만(1973~ ) △ 브레이크가 강력해야 자동차가 안전하듯 인생의 브레이크가 튼튼해야 삶이 안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브레이크와 후진이 없기를 기도하지만, 살다보면 브레이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