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의 연보 한 번도 우리를 부숴본 적 없었다 명자나무는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우고 아버지는 채찍처럼 이름을 휘둘러 나를 키웠다 이름은 상처와 같아서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피가 흐른다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수리 나무 밑 어두운 우리, 머리 위에서는 내내 마른 잎사귀들이 울었다 내일은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의 한때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웃고 있다 내일은 어떨까 그것이 내 일이다 우리는 서로 밤마다 멀어졌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견디는 법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 이따금 바람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등을 후빈다 색깔 없는 구름들이 우리를 지키고 마른 잎사귀들이 우리를 덮고 우리는 흙이 되고 우리는 서로를 가두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되..
▲ 가을의 도박 낙엽더미 큰돈처럼 싸들고눈시울 붉어져문 밖 뚝 떨어진 날씨와 싸우는 목소리흰 서리가 자주 창을 막고뿌연 고통 너머잡지 못하는 손목이 아프다는 전갈아직 흔들리는 문고리……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말겠지문도 얼고겨울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지겠지 가을의 도박…… - 김경미(1959~ ) △ 가을에는 뭐든 걸고 싶다. 벽공(碧空)과 흰 구름에게, 싸늘한 떠돌이 바람에게, 고단한 낙엽의 발목에게, 추파(秋波)에게, 첫서리에게, 무엇이든 걸고 싶어진다. 그러나 가을에 거는 것들은 날리기 마련이다. 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얼어버릴 테니. 뚝 떨어진 날씨와 흰 서리가 가을의 판돈을 까먹을 테고, 싸들고 온 ‘낙엽더미 큰돈’도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질 테니. ‘뚝 떨어진 날씨’ ‘..
▲ 문경 옛길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 안도현(1961~ ) △ 미래가 꼭 지금보다 아름다운 자리에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는 말 속에 ‘진보’나 ‘진화’와 같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그런 착각이 가능하려면 좀 더 나은 현실이 자꾸만 우리를 견인해가야 하는데, 지금 여기 2013년의 파국과 안부는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아무래..
▲ 자동판매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자동판매기를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 최승호(1954~ ) 부분△ 돈을 넣고 누르면 무엇이든 나온다. 돈만 넣으면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판매된다. 음료수, 스낵과 인스턴트식품, 책이나 기념품 따위의 온갖 일상용품, 유통이 쉬운 야채나 과일은 물론 광고나 뉴스 따위의 각종 디지털 콘텐츠까지도 나온다. 머지않아 사랑할 파트너뿐만 아니라 숭고한 자비와 구원도 나오게 될 여기는 ..
▲ 공(球) 나는 흰 빗자루를 들고 있다 성장하려는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여 작은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괴롭히고 있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고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불안은 순결한 목소리로 숲 비둘기 흉내를 낸다 여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과를 마친 남자 선생들이 축구를 한다 공을 교실이 있는 어두운 건물로 굴러 들어가고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이 잠시 공 없이 서 있는 남자 선생 구경을 한다 연못가 시계탑의 조각상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있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 비 그친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는 파리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 박판식(1973~ ) △ 어떤 정념도 정착할 수 없이 흘러가..
▲ 옆집 가장 훗날을 기약하는 백수 가장지금 실업수당 받으러 집 나서는젊은 뒷그림자가 유난히 검다 옆집 가장은저도 모르게 튕겨져나오게 된 저기 저정글게임장의 원리를 잘 모른다아직도 닭 부리 쪼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세상에서잘사는 법을 모른다그저 오늘 거리에서 서성이는 겁먹은 젊은 눈동자가겨울 날씨처럼 흐릿하다 훈기 찾아 제 입김 불어보지만아내의 쪼그라든 스웨터처럼허공에서 형편없이 오그라들었다는데오늘 아침도 늦잠 자고 심신을 뒹구는 사이둘째 아이는 학원까지 다녀와자기 방문을 쾅, 닫았다는데쾅, 마음마저 부서져버린 어제가 있었다는데 - 이사라(1953~ ) 부분 △ 한데 묶어 ‘백수(白手)’라 부르지만 일을 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무업자(無業者)나 무위도식족(族)과 실업자(失業者)는 다르다. 근로능력과..
▲ 전체성 무관한 예화벌들이 눈 뜬다. 노동을 위한 생성. 우윳빛 겹눈 위로 그림자가 지나갈 때 검은 날개는 체제를 지배했다. 꽃과 집 사이를 오가며 지나는 계절. 꿀에 전 작업복을 버리듯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는다. 개미들의 환영이 파도처럼 밀려오길 바랐지만 실상 가다 막히는 좁은 시냇물에 불과했다. - 부분, 박희수(1986~ ) △ 총체가 불가능한 세계에 버려진 주체들의 외침으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까. 이 시에서 벌이 일하는 모습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노동 주체들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벌들에게 날아간다는 행위란 우선은 꿀을 모으기 위한 노동이며, 벌들의 노동이 가중될수록 이곳의 체제를 지배하는 논리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또 벌들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꽃에서는 꿀을 ..
▲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1921~1984) △ 10전의 화폐가치를 가늠해보기 위해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을 읽는다.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10전짜리 백통화가 있었고, 백통화 단위가 푼(닢)이었고, 80전이면 모주(탁주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