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 마氏사람의 키가 작아진 왕국에서 태어난 그는어둠의 성채에서 버섯처럼 차분한 살을 가진 여자와깊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어구멍의 끝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최후의 버섯을 캤단다마리슈퍼, 구멍 뚫린 마리오의 버섯주인공이 변신하는 동안의 불문율을 지키러사람들은 천장이 높은 마트로마트로간다간다간다간다왕국 사람들의 키는 자꾸만 낡아 간단다 지금이다어두운 구멍에서 쏘아 올린 버섯들을 봐라잘생긴 마트가 사정하는 빛 사이로굴욕보다 단단한 습지를 딛고 진열된쌓인 먼지를 끌어안고 스스로 열을 내는봉지 과자와 하우스 밀감과 물렁해진 껌들의하이퍼바이오닉크리스탈에너지그것을 감싸는 일수 대금과 명함판 대출 광고의방어력증강붐붐매트릭스파워업히어로를 향한 마리오의 변신은 - ‘슈퍼 마氏’ 부분, 서효인(1981~) △ ‘슈퍼마리오’..
▲ 추석 무렵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벼 냄새처럼 새뜻했다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 맹문재(1965~) △ ‘처럼’으로 엮인 은유의 매듭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순박한 환유의 두름이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흙냄새 나는 사투리’가 불러들이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고향의 말은 어떻게 곰살스럽..
▲ 방황하는 기술* 친구가 있고 여자친구가 있으며 토론이 있고 회합 장소가 있다 내가 하룻밤 묵었던 호텔이 있고 매음굴이 있으며 유치원이 있고 가끔 쉬어가는 벤치가 있다 학교로 가는 길이 있으며 장례를 지켜보는 무덤들이 있다 지금은 잊혀진 유명한 카페가 있고 한번은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미로의 입구에서 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많은 방황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한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또 지나가기 위해서는 - 김언(1973~ ) (*발터 벤야민의 저서명에서 차용)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장막에 의해 앞이 캄캄할 때, 지금의 선택이 우리를 막다른 길로 인도할까봐 주저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미궁에 빠진 것이다. 우리 앞에 장막이..
▲ 고추값 어머니,올해도 어머니 맘과 하늘의 마음은서로 잘 맞아 곡식들이 이렇게 저렇게소담스럽습니다.사람들은 콩 심으랄 때 고추 심고고추 심으랄 때 콩 심었으나어머님은 이제나 저제나 고추를 심으셨습니다.저렇게 보기도 좋은 곡식을 자식들같이 가꾸어이렇게 먹기도 좋게 다듬어서누구 좋은 일만 시키고어머니, 어머님은쭉정이나 벌레 먹은 것들을 잡수시며 사셨습니다.잘되면 잘되어 걱정으로고추가 저렇게 불송이같이 이글거리는데어머님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올해도 고춧금은 똥금입니다. - 김용택(1948~ ) △ 간(된)장이나 소금에 절인 고추는 내 밥상의 감초다. 어지간한 요리에 빼놓지 않는 청양고추는 내 요리의 방점이다. 쌈장에 찍어 먹는 풋고추나 오이고추는 내 식욕의 마지막 비상구다. 멸치랑 볶은 꽈리고추조림, 고명으로..
▲ 신뢰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지? 기계가 되는 법을 너는 몰랐지? 아직 몰라 답답하고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 기계 되는 법을 모르고 기계들은 네가 된다 본질적으론, 기계들이 네가 되면 기계가 너고 기계인 너는 오늘 되고 싶은 게 되어 있고 너는 이제 만족했을까? 입력하면 기계들은 믿는 것이다 믿기지가 않을 텐데 망설임 없이 기계에게 입력했다 너는 부자야 기계가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누가 내게 물어봤다 너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해도 나는 부자가 아니구나 만약 내가 진짜 부자면 … 믿을 수가 없을 거다 너무 좋아서 - ‘신뢰’ 부분, 김승일(1987~) △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꿈꾸는 존재이며, 때때로 그 변화는 현재를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위태롭게 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박준(1983~ ) △ 시 한 편을 써내려가는 힘은 어쩌면 유서를 쓸..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 훔쳐가는 노래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좁은 장소를 치우고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눈의 흰 입술들처럼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훔쳐가는 노래’ 부분, 진은영(1970∼) △ 나에게 매혹되었다면 너는 내 ‘주머니에 있는 걸 다’ 훔쳐야만 한다. 내 모든 걸 훔치고 빼앗을 때 날 사랑한다 ..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강은아와 은반지 은반지를 끼고 깍두기를 담갔네빨갛게 물이 든 은반지누가 누가 사줬나 우리 그이가 사줬지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성으로 끼고 다니던 은반지칫솔로 아무리 닦아도 은색이 되지 않던 은반지그이는 어딨나 지난 가을에 떠났지은반지 같지 않은 은반지가짜 은반지를 끼고 혼자 저녁을 먹네새로 담근 깍두기를 상 위에 올려놓고저녁을 먹으며 보고 또 보는 은반지강은아는 어딨나 지난 가을에 죽었지도무지 은반지 같지 않은 은반지치약을 아무리 발라도 은색이 되지 않던 은반지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던 은반지가짜 은반지를 끼고죽은 강은아가 혼자 저녁을 먹네 - ‘강은아와 은반지’ 부분, 황병승(1970~) 은(銀)은 참 민감한 금속이다. 공기 중에 놓아 둔 것뿐인데 쉽게 녹이 슬고 색이 검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