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향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은 할머니의 얼굴 같다 입술을 내밀 때 내 얼굴은 외증조할머니의 얼굴 같다먼 옛날 할아버지가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이마가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 내 愛人의 얼굴에 가을, 붉은 단풍이 든다 - 신기섭(1979~2005) △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고, ‘언어의 초월’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새로움은 불행을 담보한 후에야 도약하는 관념이어야만 하는가. 울고 있을 때 표정이 할머니와 닮아 있고, 입술을 내밀 때, 그러니까 말을 하려는 찰나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구애할 때의 표정이 외증조할머니를 닮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정서와 의지..
▲ 용병 이야기 그날 우리는 짐을 싸면서도 용병인 줄 몰랐다. 끗발이나 빽도 없는, 대가리 싹뚝 민 개망초 보병들이다. 야간 군용 트럭으로 잠입한 오음리 특수훈련장, 이른 기상나팔에 물구나무 선 참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아침 점호에 같이 고향을 본 후 힘차게 몇 개의 산을 넘었다. 이빨까지 덜덜거리는 상반신 겨울, 주는 대로 먹고, 찌르고, 던지고, 복종하는 훈련병. 정곡을 찌르는 기합에, 겨울 새떼들은 숨죽이며 날아올랐다. 하루 일당 1달러 80센트에 펄럭이는 성조기, 우리는 조국의 이름으로 낮은 포복을 하였다.*오음리의 겨울은 이제 누구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생선에게 고양이를 맡기든 말든 죽은 시인도 죽은 척할 뿐이다. *통킹만 사건(1964년)을 빌미로 미국의 베트남전이 시작됐다. 2..
▲ 두 마리 물고기 어린 시절 목도한 부모의 교합 장면은 지느러미를 잃은 두 마리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같았다 방은 어둡고 습했다 두 마리 물고기는 괴로워 보였고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조용한 가운데 모아지는 호흡 소리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낯선 움직임이 무언가 애달프단 생각 때문에타 버린 숲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오줌을 참았다 어쩌면 그때, 그 슬픈 몸부림을 빌려 동생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 박연준(1980~ ) △ 많은 시인들이 태생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어떤 시인은 태생의 질문 대신 ‘질투’를 던진다. 내가 태어난 것이 질투라니! 아이는 뜻하지 않게 부모의 교합 장면을 훔쳐보게 되었고, 어둡고 습하고 가난한 방에서 정을 나누고 있는 부모는 아름답기보다는 살려고 몸..
▲ 술값은 누가 내? 전화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전화기 액정 화면엔 입력해둔 사람의 이름 대신 특징이 떠오릅니다학습지 선생님이 전화하면 시간 맞춰 오질 않아영어 학원에서 전화 오면 숙제에 깔려 죽어빼빼 마른 이모 전화는 야식 필수 고모는 감자 먹고 이빨 튼튼 할머니는 시기면 시기는 대로 혀엄마 휴대전화는 잠자리보다 더 눈 많아아빠 사무실 전화는 야근 없인 못 살아아빠 휴대전화는 밖에서만 폭탄주 아홉 잔……얼마 전 바뀐 새로운 아빠 휴대전화 닉네임은술값은 누가 내? - 곽효환(1967~ ) 부분 △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새, 달과 함께 걷다, 숨죽인 천둥, 길을 여는 바람, 아침에 따라가, 대지 위에 살았던 어떤 … 기억에 남는 인디언 이름들이다. 군더더기 없는 직관의 명명법이다. 태어난 끝자리 연..
▲ 가위잠 수술만 잘되었다면 고장 난 엄마라도 가질 수 있었겠지 엄마의 똥을 닦으면 휴지엔 박하 향 웃음이 묻을까 먹물 같은 눈물이 묻을까 할머니의 똥을 치우고 손을 씻다가 죽은 엄마처럼 나도 엄마가 되었겠지 할머니가 되었겠지 마려운 줄도 모르고 내지른 줄도 모르고 실밥이 자꾸 비어져 나오는 항문이 꿰매진 인형이 되어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끝도 없는 자장가를 듣게 될까 부르게 될까 빈집 같은 몸속에 누워잠이 마려울 때마다 뒤척뒤척 머리를 열고 닫으며 혼자 누는 자장가 변기 뚜껑을 열고 닫듯관 뚜껑을 열고 닫듯 -이민하(1967~) △ 환상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좀 더 참혹해졌기 때문이다.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가 되고 그렇게 할머니를 수발하는 “고장 난 엄마”..
▲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
▲ 이별의 노래 나는 ‘목숨을 구하는 약이라도 되는 듯 네 이름을 혀 위에 올려놔 본다’라고 문자를 보낸다 곧 너는 ‘그럼 내가 약장수네?’라고 슬며시 피하는 답신을 보낸다 그러곤 우리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을 응시하듯 각자의 반짝이는 창문 앞에서 희미하게 웃는다 따라오지 마, 이곳은 죽는 길 그러면서 너는 벼랑 위를 사뿐사뿐 건너간다 나는 너와 계속 장난칠 수 있게 벼랑에 부딪치는 햇빛도 바람도 소나기도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네가 풀섶에서 우연히 찾아내고 기뻐하는 새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죽을 몸, 어서 네 가족들에게 돌아가 멍멍개야! 그러면서 너는 내 앞발을 붙잡고 쎄쎄쎄 해 준 뒤, 쫑긋한 두 귀 사이를 여러 번 쓰다듬어 준다 이제 됐지? 입을 열면 할 말은 나오지 않고 ..
▲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 십만 원이면 사슴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우록에 갔다 동네 테니스회 야유회 날이었다모자를 눌러쓰고 쭈그리고 앉은 사내들 운명적대어(大漁)를 꿈꾸는 유료 낚시터 지나, 빠듯한 외통수길을 따라갔다 맑은 물 흐르는 시냇가에 봄풀을뜯는 염소들 뾰족한 입에서 흰 이빨이 빛났다 마리당 이십만 원에 두 마리를 잡았다고 회장님말씀하시자 모두들 기립 박수를 했다 미리 연락받고 상 차려놓은 터라, 손 씻으러 수돗가에 갔다비누와 수건이 놓여 있는 그곳에 아직 치우지 않은식칼과 도마가 있었고 군데군데 염소 수육이 흩어져있었다 수육의 살점이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했다 - 이성복(1952∼ ) 부분 △ 산록(山麓·산기슭)의 신록(新綠)에 묻혀 우록(암사슴)과 더불어 우륵이 만들었다는 가야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