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극장가에 머물며 ‘장기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는 어떤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시시한 영화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서 한껏 풀이 죽은 취업준비생 신분의 젊은 처자가 고향 시골집에 내려가 제 손으로 밥을 챙겨 먹는다는 내용이 사실상 그 중심 이야기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식재료가 많지 않고 돈도 없지만 요리할 시간이 넘쳐난다. 여주인공이 주로 제 입에 들어갈 먹거리를 제 손으로 마련하여 요리를 하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과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시간을 보내는데 영화는 계절과 함께 자연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그 시간에 집중할 뿐이다. 갈등이나 반전은 물론 이렇다 할 사건조차 거의 없다. 기껏해야 벼락 치는 밤 김태리가 연기하는 혜원이 이제 막 새 식구가 된 강아지 오구를 끌어 안고 잤다는 것 정..
요즘은 자고 일어나면 ‘미투’ 운동이 새롭게 호명하는 유명인사의 이름부터 살핀다. 하루를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미투’와 함께하는 나날이라고 할까? 한반도의 햇빛 찬란한 평화 무드 속에서 미투라도 붙잡고 어떻게든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정치인 무리들이 있고 심지어 김어준의 표현대로 문재인 정부의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의도로 ‘공작’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투 지지자이다. 그것도 아주 진실되고 열렬한 지지자. 설사 그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돈줄’로 자기 내부의 피해자들 입을 막고 상대편 내부를 부추기고 있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히려 민주당이 산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막강한 파괴력의 이 미투 운동을, 그동안 너무도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
미국의 산타크루즈는 봄부터 여름까지 약 6개월간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리는 사막지대다. 바로 그곳에서 아내는 무용가로, 남편은 작곡가로 사는 부부가 있다. 미 서부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예술가 커플이다. 그런 그들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첫 비가 내리면 듣는 음악이 있었다. 황병기의 ‘가을’이었다. 마치 축제일의 의식인 듯 지난 3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 곡을 들었다고, 무용가 아내가 자기 집에 황병기를 초대해서 얘기했다. 황병기는 그런 음악가였다. 국악이라는 한국인에게조차 낯선 미지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두고두고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든 분. 그뿐 아니라 국악을 전대미문의 전위적인 실험 음악으로 안착시킨 진정한 ‘대가’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방탄소년단의..
트렌드의 최전선을 다루는 패션잡지에서 일하며 아이템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구세주를 찾듯 종종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마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업계에서는 선수권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촉’이 빠르고 ‘입담’마저 ‘메달감’으로 통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었다. 패션 피플 1세대답게 그의 정치적 성향은 사뭇 ‘조선일보’스러운 데가 있었고 잘 모르고 보면 그냥 ‘잘 늙지 않는 날라리’ 분위기였지만 내가 아는 그는 보기보다 훨씬 더 지성적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순수하고 깊이라든가 진정성마저 있는 사람이라 나는 그를 기꺼이 ‘선생’으로 생각했다. 그런 그가 몇 해 전에 매우 신선한 ‘새해 결심’을 했던 걸로 안다. 내가 패션지 기자 신분으로 맞은 거의 마지막 새해였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그..
가끔 떠나온 옛 연인을 떠올리듯 카탈루냐를 생각한다. 그곳은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스페인과 너무도 기질적으로 달랐던, 무엇보다 스페인 제국이 저지른 정복의 역사와 투우라는 잔인한 스포츠를 싫어했던, 뼛속 깊이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각인된, 도로 표지판에 카탈루냐어를 영어나 스페인어보다 먼저 쓸 만큼 자기만의 언어와 문화에 자부심이 컸던,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던 스페인 속의 비(非)스페인이라는 걸 이방인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각별한 여행지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유쾌하게 이방인에게 관대하던지, 또 건축과 공간을 다루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 감각은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안토니오 가우디와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의 후예들답게 누구 ..
시골에서는 40대 젊은 여자가 흔치 않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많은 강원도 산골 같은 경우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도 드물고 개 끌고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젊은 여자가 나타나 개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자전거를 타고 개를 끌고 다니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그해 조용한 그 시골마을의 최대 사건이며 구경거리였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모두들 밭일하던 일손을 멈추고 기이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그 여자’를 바라봤다. 그 이후 우리 동네에서 나는 ‘개 끌고 다니는 여자’로 통하게 됐다. 무슨 체호프 소설의 주인공처럼 여전히 미스터리한 구석이 많은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라는 여자는…. 개를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산책한 지 4년이 지났건만 동네 아주머니는 ..
여행과 책읽기는 닮은 점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시간 보내기이며 달콤한 휴식이며 동시에 재충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행과 책읽기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순식간에. 그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가 떠나온 현실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때문에 얻게 되는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게 된다는 것. 독서와 여행을 통해 말이다. 세상에 여행과 독서의 힘으로 인생을 바꾼 수혜자 그룹이 있다면 나 자신이야말로 그 그룹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표 쓸 각오로 받아낸 1년 무급 휴가로 여행과 독서를 병행한 덕이다. 틀림없이 그 덕이 맞다. 그 경험 ..
‘살충제 계란’ 파장 속에서 누구든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보건 당국이 독성화학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는 기업 혹은 농장과 결탁을 하고 있다면?” 누구든 했을 법한 질문이다. ‘양심’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언론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질문이었고. 영화 을 만든 최승호 PD가 집요하게 MB(이명박 전 대통령)를 잡고 늘어지며 하는 대사처럼 “언론이 질문을 못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렇게 묻는 언론이 있었고 그 언론이 꼽은 최고의 전문가는 조심스럽게 ‘예스’나 다름없는 답을 내놓았다. 서울대 약학과 정진호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실에서 관리했다는 살충제 계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인체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