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오랜만에, 대학을 찾았다. 1980년대식 초고속 일본어를 가르칠 학자를 찾아서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2박3일 만에 일본어 철자와 문법을 배우고 곧바로 원전을 읽었다. 철자와 필수 문법만 초고속으로 익힌 뒤 새까맣게 사전을 찾아가며 학습한 일본어 원전에 힘입어 운동권을 이끄는 이론가가 되고, 학자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익힌 일본어로 책을 번역한 이도 있고 도쿄 주재 특파원이 된 사람도 있다. 당시, 운동권 선배들에게 유통되던 전설의 일본어 문법을 정리해 책으로 펴내기도 했던 일문학자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물론”이라고 말하면서 덧붙였다. 엉성해 보이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일본어 학습법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베를린이다. 이 도시에 들른 김에 다시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았다. 도쿄에 머무는 지인의 SNS 게시글을 읽고 나서다. 글 제목은 ‘일본은 여전히 패전 중’. 일본 서점가에 전시된 수많은 혐한국, 혐중국 서적을 보고 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적었다. 잃어버린 20년, 일본이 잃어버린 건 세계가 부러워하던 특유의 매뉴얼 뿐 아니다. 이제 이들은 그저 부지런하고 성실하면서, 천박한 장삿꾼일 뿐이다. 일본은 패전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아직도 패전중이다…. 댓글에는 누군가가 일본 도심 서점의 핵심 코너를 이런 책들로 가득 채운 사진도 올렸다. 일본의 현재가 서점에서 읽힌다면 독일의 현재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투영된다. 이 문 앞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교민들이 매월 셋째 토요일, 추모집회를 여는 ..
1. 추석 연휴가 지나고 있다. 긴 연휴, 귀성을 포기한 채 한가하게 보내면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버릇처럼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속도로 여기저기가 막히고, 서울서 부산, 광주까지 오가는 데 몇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들이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모처럼 맞이하는 연휴, 장시간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라디오를 켤 때마다 귀경객을 위로하는 방송을 듣노라면, 연휴를 앞두고 나눈 “즐겁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라”는 덕담들이 무색해진다. 추석 연휴가 즐거움 못지않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실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남녀와 세대, 약자와 소수자 문제 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전통 명절인 추석은, 가부장..
1. 인문학, 특히 철학은 여유에서 비롯됐다. 춘추전국 시대, 살아남는 것 자체가 화두였던 상황에서 출발한 동양 철학은 그렇지도 않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철학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자유민 사이에서 시작됐다. 현상적인 것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근원을 묻는 것부터가 당장의 쓸모를 떠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훌륭하게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한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어떻게 탁월하게 살 수 있는가를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 갈급한 생존의 문제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여유 있는 사람의 공부인 것은 지금도 여전한지 모른다. 얼마 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철학자가 대학과 인문학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말했다. “두 딸이 인문계 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절대 안 된다며 말렸습니다...
1. 우리 동네에 새로 지은 교회는, 적어도 입지만으로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나지막한 산을 등진 교회의 남쪽 정면은 연못이 있는 생태공원이다. 좌우에는 축구와 족구, 농구, 배드민턴, 게이트볼 등이 가능한 체육 시설이 있고, 연못가에는 문화마당이 조성되고 있다. 주택과도 거리가 떨어져 소음 민원에서도 자유롭다. 입지가 좋다보니 이 교회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린다. 얼마 전 주말, 이 교회에 버스와 승용차 수백 대가 몰려들었다. 교회 정면에 연합 어린이 경연대회가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겉만 보던 교회의 건축이 궁금하던 차에 들렀다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침 성경시험을 치르는 예배당을 둘러보다 진행자가 전하는 주의사항을 듣고서였다. “시험 중에 고개를 들지 마세요. ..
끝내, 세월호 참사는 한낱 참사로만 기억될 것인가. 수많은 아이들을 차가운 바닷물에 내버려두고 도망친 지 50일, 참사를 불러왔던 문제들이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조적 비리를 캐겠다던 수사는 오리무중이고 유병언은 뒷북수사를 피해 도피 중이다. 국정조사는 파행 중이고 ‘관피아’ 논란은 여전하다. KBS 성원들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공정방송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쓰리고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들은 또 있었다. “가난한 집 애들이 (…)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 때는 국민이 조용하게 애도하며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왜 시끄러운지 이해를 못하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백정이다.” 가난한 이들을 능..
귀갓길, 공동체에서 공부하던 청년이 일하는 공방에 들렀다. 그 청년은 고용된 목수다. 출퇴근하는 자전거 핸들에 책 내용을 정리한 쪽지를 달고 다니며 공부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청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요즘 공부를 미뤄두고 공방에서 살다시피 한다. 단순 기능공에서 창조력을 지닌 장인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여느 일이 그렇지 않으랴만 동서고금을 통해 목공만큼 인간 친화적인 일도 드물다. 목공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구나 작품을 내 손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를 쓰는 지식에 손발의 경험과 온몸의 힘을 조화시키며 전 과정에서 창의와 상상, 그리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손재주가 없는 초보라도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나무를 매만지다 보면 어렵잖게 목공 삼매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도시..
1. 50대 중반의 우울 탓인가. 눈물이 잦아졌다.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우리 아이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엄마의 사진을 보며, 엄마의 비원에도 끝내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숨이 막힌다. 자주 절망을 느낀다. 엊그제, 벌떡 일어나 그간 미루어 온 청년 인문학 결사(結社) 꾸리기에 나섰다. 그냥 ‘모임’이라고 하지 않고 ‘결사’란 한자어를 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결사가 주는 어감대로, 조금 더 독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다. 이 결사에 이어 주부 공부 모임도 만들기로 하고 강의며 길잡이를 감당할 학자들과 머리를 맞댔다. 요 며칠,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참사에 넋을 잃고 있다 허둥대며 이런저런 공부 모임을 자꾸 서두른다. 청년 인문학 결사는 앞으로 1년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