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서 진행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강독이 세 번째 세션을 맞이한다. 이번 강독에서는 18~19세기 후세대 철학자에 의해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의 후세대 철학자에 대한 반응을 다룬다. 지젝에 따르면 칸트의 이 출간된 1787년에서 헤겔이 사망한 1831년까지 44년은 사유의 강도가 집중된 시기다. 인간의 사유가 정상적으로 발달했다면 수세기, 아니 수천년에 걸쳐 일어났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면서 후세대에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는 후학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지젝은 후학에게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가 후학에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철학사를 다루는 가장 재미있고도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
40~50대, 생계에 바쁜 직장인이 새로운 외국어를 익힐 수 있을까. 공부를 업으로 하는 학자를 제외하면 사례는 매우 드물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건 고사하고 학창 시절, 어렵게 공부한 영어를 잊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스트레스와 음주, 흡연 등으로 뇌세포조차 날로 퇴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50대인 나를 포함한 30~60대 직장인, 주부, 그리고 은퇴자들이 이번 주부터 프랑스어 익히기에 나선다. 참여자 대부분은 프랑스어 발음은커녕, 알파벳도 모른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프랑스어를 위해 떼어내기로 약속한 시간은 일주일에 최대 10시간, 자습만 치면 하루 평균 1시간 이내다. 주 1회 모임에 기간은 6개월, 프랑스어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를 제법 하는 것..
역시, 대통령은 힘이 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와 문화 융성의 핵심으로 인문학 진흥을 강조한 것이 불과 몇 달 전. 벌써 관련 예산까지 확보된 모양이다. 예산 집행을 앞둔 교육, 문화 부처와 산하기관들의 움직임이 변두리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감지된다. 시민들과 어울려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는 나로서는 이른바 인문학 열풍에 더해 운 좋으면 수혜자가 될지 모를 예산까지 준비되고 있는 셈이다.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인문학 진흥이 싫어서가 아니다. 뿌리와 줄기는 그대로 두고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에 마음이 쓰여서다. 알다시피 인문학의 본류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지자체나 대학 밖 인문학 단체의 일회성 시민 강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대학이다. 대학 인문학과는 그렇다 치더..
“가난한 선비의 빈손으로 오십시오.” 길담서원 서원지기 박성준 선생이 얼마 전 보낸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다. 1월10일, 새로 이사한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집들이를 한단다. 집들이에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초청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도 연다고 한다. 오로지 개발과 성장만 좇던 이 땅에서 자발적 가난을 역설해 온 김종철 선생은 좋은 삶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길담서원은 책방과 찻집, 음악과 미술이 있는 공부와 문화 공간이다. 청소년 인문학교실, 철학 공방, 바느질 인문학, 책읽기,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원서 읽기 등 여러 공부 모임이 열린다. 작은 음악회와 전시회, 강연회도 개최된다. 2008년 문을 연 통인동 길담서원이 이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몇 달..
1.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고 있음인가. 현 정권 들어 아주 간혹, 정부나 산하 연구소 관계자의 전화를 받는다. 시민 인문학 진흥을 위해 무슨 아이디어가 없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이 문화 융성의 일환으로 인문학을 언급하자 유관 부서들이 정책 개발에 나선 모양이다. 내 대답은 회의적이다. 인문학이 4대강처럼 될까 봐서다. 인문학의 본령은 비판과 성찰이다. 녹색 마인드 없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 생태계에 치명타를 가했듯이 인문 정신과 거리가 먼 정부의 인문학 사업 또한 인문학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 정부의 인문학 지원 사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문한국(HK)사업이다. 2000년대 중반, 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라며 난리를 치는 통에 만들어진 프로젝트, 인문학 연구 인프라를 구축..
어쩌다 벌이가 시원찮게 되면서 하고 싶었던 일조차 희미해져 버린 당신과 나, 이런 우리도 해마다 2~3주 정도 유럽이나 미주, 인도나 아프리카를 여행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면 우리는 은퇴한 뒤에도 경제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가 은퇴해 시간이 많아지면 해마다 프로방스나 알프스 인근의 고풍스럽고 한가한 마을, 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의 농장 등지를 돌아가며 2~3개월쯤 살아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우리의 거주 공간, 음악 소리를 제대로 내기도 어려우니 목공 같은 취미 생활은 엄두도 못 낸다. 전기톱이나 콤프레셔 같은 공구의 소음이 시작되는 순간 이웃이나 아파트 관리인이 달려와 문을 두들겨댈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목공삼매에 빠지며 뭔가를 ..
1. 어지럽다…. 얼마 전 공동체를 찾았던 한 대학 교수가 했던 말이다. 마침 에릭 홉스봄을 읽던 이들이 노각으로 오이 냉채를 만들어 나누고 있었다.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한 방에서는 이반 일리치 읽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글쓰기 스터디가 합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목공 삼매에 빠져 있었던가. 세미나실 하나를 좌식으로 바꾸고 낮은 책상을 만들던 참이었다. 그가 보기에 어지러운 건 공동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강좌와 세미나, 스터디는 더 어수선했다. 그에 따르면 논어, 맹자 강독과 그 성격이 상반되는 노장 및 불교 경전 강독의 병행은 잡화점식 시간표의 전형이었다. 불교 경전 읽기 모임과 희랍어 성서 읽기 모임이 동시에 개설돼 있는 것도 그랬다. 그는 몰아세우듯 물었다. 니..
문화 융성이 국정 지표 중 하나로 된 덕인가. 인문학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느낌이다. 인문학을 벼랑 끝에 내몬 이들이 입만 열면 인문학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나 교육이나 문화 관련 부처, 대학뿐 아니라 경제 관련 부처도 포함된다. 인문학이야말로 창조경제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CEO 인문학’ ‘아이폰 인문학’이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다. 슬라보예 지젝의 무겁고도 난해한 저작 초판이 출간 열흘 만에 소진되고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간판을 내건 단체만도 100개나 되는 시대, 바야흐로 인문학의 전성시대다. 때 맞춰 나도 인문학을 내걸고 숟가락 하나 얹었으니 제대로 흐름을 탄 셈이다. 문제는 공동체에서 나의 주 임무가 고상한 강의나 세미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쑥스럽게도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청소와 설거지다. 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