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누구만의 안전을 위해, 누구만의 이윤을 위해, 누구만의 권력만을 위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세월호와 함께 슬픔의 심해로 끝없이 가라앉아가던 우리들은 이제 살아 돌아 왔는가? 세월호와 함께 침몰되어 가던 한국사회는 구조되었는가? 한국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경악들은, 충격들은, 전망들은, 기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열한명의 실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하고, 때가 되면 한번씩 찾아오는 태풍을 지난 듯, 대한민국 세월호는 다시 출항해도 이젠 아무 문제없는가? 이건 아니라고, 이번주 토요일(28일) 전국에서 ‘2014 대한민국 세월호 버스’들이 출발한다. 똑바로 된 진상규명에 나서라고, 오늘도 수많은 세월호들이 정부의 무능과 탄압에 의..
이런 말을 잘 안 쓰긴 하지만 정말 스펙터클한 날들이다. 어제(21일)는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관 앞에 있었다. 다시 추모시를 읽어야 했다. 지난 5월18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권력에 의해 시신이 탈취당했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양산분회장 염호석님의 시신이었다. ‘5·18’ 광주가 데자뷰되었다. 그는 유서를 세 통 남겼다. 첫 번째는 ‘아버지 어머니께’였는데, ‘제가 속한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 장례를 치러달라’고 했다. 두 번째 편지는 함께했던 ‘삼성서비스지회 여러분께’였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지 못하겠기에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달라’고 했다. 그는 동해안 정동진 해변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을 택한 이유는 ‘해가 뜨는 ..
몇 년 동안 산 자들과 살지 못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다. 문득 젊은 날 한때 내 의식과 행동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문구 하나가 떠오른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숙고가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다.’ 스피노자의 에 나오는 이 구절을 만나며 나는 청년시절 내내 빠져들던 어둡고 염세적인 절망의 포즈와 결별하게 되었다. 삶에 대해 숙고하기에도,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하루하루 반응하고 환호하기에도 바쁜데 웬 죽음에 대한 숙고인가 하는 대전환이기도 했다. 근래 몇 년 동안 수많은 열사 투쟁에 함께하면서, 죽겠다고 고공과 망루로, 단식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을 함께 지키자 하면서도 진정한 바람은 빨리 생에 대한 즐거운 숙고의 시간으로 넘어가자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끝도 없는 죽음의..
봄이 오고 있다. 지난겨울은 너무 추웠다. 시청 광장이거나, 이제 다시 쓸쓸해져가는 대한문 앞이나 몇몇 군데에 조그마한 촛불들이 피어오르곤 했지만, 우리 모두의 생활과 마음을 덥히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막연하게 빨리 봄이라도 왔으면 하곤 했다. 그 봄이 이제 오고 있다. 그 겨울 사이 다시 몇 편의 추모시와 글을 써서 길거리로 나서야 했다. 가장 최근의 시는 밀양의 고 유한숙 어르신 100일 추모제에 바치는 시였다. ‘원전마피아들의 짜릿한 속셈만 흐르는 곳/ 푼돈의 모략이 판치고/ 죽음의 전류가 관통하는 메마른 땅/ 계엄의 헬리콥터가 뜨고/ 점령지의 병사들이 진주하는’ 그곳으로 아프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으며 밀양으로 가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제쯤 우리는 다시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버린 우..
내내 꿈이었던 개인 사무실을 냈다. 8층 전면유리 아래로 시흥대로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기역자로 넓은 책상을 배치하고, 한쪽엔 침대도 만들어 두었다. 지난해 12월30일 회사가 도망이사를 가고 난 기륭전자의 휑뎅그렁한 사무실 한편이다. 처음엔 불도, 물도 없었는데 웬일인지 얼마 전부터 전기와 수도와 중앙난방을 모두 열어주었다. 이런 좋은 곳에서 달달 떨며 두 번이나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던 생각을 하니 은근히 약이 오르긴 한다. 갑자기 선심을 쓰는 게 아마도 끌어낼 때가 가까워오는가 보다. 201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더니 무장경찰들이 밀려들었다. 카고차와 앰뷸런스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도가도 못하는 포클레인 위였다. 건너편 공장 1층 옥상에는 단식 중인 여성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