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희생자인 황유미씨 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스물셋에 반도체공장에서 직업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 한 소녀의 이야기.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선 황상기 아버님. 한 명 두 명, 용기를 내어 나타나기 시작한 반도체공장 직업병 사망자들이 134명, 투병자들이 233명이었다. 영화 으로도 알려졌던 일이다. 박일환 시인의 르포집 도 있고, 르포작가 희정의 도 나왔었다. 김성희씨의 만화책 과 김수박씨의 만화책 로도 그려졌다. 극단 ‘날’이 연극 로 기억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9년이 지나고도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예년보다 초라해진 추모제. 여러 희생자 가족들, 반올림 활동가들인 이종란, 공유정옥씨와 삼성바로세우기운동본부의 조대현씨 등 몇 사람의 얼굴이 ..
부평역 거리나 낙원동 악기상가 초입에서 시를 읽어주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쪽에서 보나 잘못 구워진 옹기처럼 치켜세워 줄 곳 마땅찮은 이었다. 말을 많이 더듬어 귀를 쫑긋 세우고 한마디 한마디를 쫓아야 했던 이다. 늘 사람들 뒤편에그림자처럼 말없이 있어야 했던 이. 그런 그가 흡사 어떤 법정에 끌려나온 죄수처럼 달달달 떨며 읽어주던 시는, 그래서 원문 내용과 상관없이 항상 새로운 긴장의 시들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우리는 때로 객석에서 한 편의 코미디 같은 그의 시낭송을 들으며 웃곤 했지만, 진짜 웃음거리는 잘난 말들이 판을 치지만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 사회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눌함은 희한하게도 모든 지배와 계몽과 권위의 언어들, 현학적이고 유려한 언어들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묘한..
‘시’보다 다른 글을 고민하며 살아온 시간이 더 많다. 2002년이었을 것이다. 노동자 생활글쓰기 운동을 꿈꾸며 잡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 때였다. 구체적인 사람들의 현실은 달라진 게 없는데 이런 현재를 어떻게 다시 문학, 글쓰기 자장 안으로 끌어들일까, 생각했던 것이 ‘르포’와 ‘여성 노동자 글쓰기’ 운동이었다. 시·소설 창작교실은 안 하고 당시엔 아예 존재하지 않던 말, ‘르포 교실’과 생경한 ‘여성 노동자 글쓰기’ 교실을 한다고 동료 문학인들이 마뜩잖아 했지만 한국 사회엔 다시 ‘르포’와 ‘여성 노동자’이야기가 필요해라는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렇게 만났던 이들에 의해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야기를 다룬 와 영화 의 원본인 , 용산 철거민들 이야기를 다룬 등 소중한 작업들이 이어져 왔다. 과 ..
“시인이 되기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시는 그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가 되는 것”이다. 한 무명 시인(?)의 글이다. 1948년 유진오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사상범으로 분류돼 처형당했을 거라 알려진다. 이십대 문청시절 우연히 이 글을 접하곤 아, 이게 내 삶이었으면 했다. 지금도 ‘시인’이기 전에 그런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다. 지금은 흔치 않지만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고, 먼저 ‘전사’가 되기 위해 문학을 뒤로하고 공장으로 농토로 빈민가로 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 ‘단원고 세월호 교실지키기 예술행동’이 있어 안산에 다녀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 정부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으며 재차 삼차 익사당하는 세월호의 진실은 언제쯤이나 인양될까. 칠판과 책상과 복도에 놓여 있는 수많은 꽃과 편지들. 어떤 진실도 인양되지 않았는데 교실이 부족하니 아이들 책상을 치워야겠다 한다. 세월호의 진실이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그 빈 의자와 책상을 남겨두면 안되나. 국가의 무능과 부조리하고 부패한 사회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반성하는 상징의 장소로 남겨두면 안되나. 모두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먼저 치워져야 하는 책상은 단원고 2학년 교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해수부와 정부서울청사에, 청와대와 국정원, 이윤을 위해 부패와 부정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저 높은 기업 빌딩..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 현장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서울대병원에서 몇 개월째 사경을 헤매는 일흔 노구의 농민이 있다. ‘개사료값보다 못한 쌀값’, 노동법 개악,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온갖 ‘학정’에 분노해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새벽밥 먹고 올라오셨던 백남기 선생이다. 그는 1971년 10월 중앙대에서 위수령에 맞서는 시위를 주도하다 1차 제적되고, 1973년 2년여 동안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1975년 2차 제적 후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교됐지만 그해 5월8일 교내에서 박정희 유신잔당 장례식 시위를 주도하고, 5월15일 4000여명의 학우들과 일명 ‘한강도하’ 행진을 하며 전두환 신군부 출현을 막고자 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고, 5월1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교..
한국에 전태일이 있다면 미국엔 로자 파크스가 있다.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 걸어서 집으로 가던 청년노동자 전태일. 그는 1970년 11월13일, 무용지물인 근로기준법 책과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면서 한국 사회 민주주의 운동의 분기점이 되었다. 전태일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에 의해 한국 사회에 민주노조 운동이, 진보정당 운동이 어렵사리 자리를 잡게 되었다. 미국 몽고메리에서 전태일처럼 재봉사로 일하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1955년 12월1일 버스 좌석을 평소처럼 백인에게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인종차별에 맞서 ‘싫습니다’라고 저항하곤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를 따라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몽고메리의 흑인들이 집단적인 버스 승차거부 운동에 나섰다. 로자 파크스가 체포된 지..
오는 20일이면 용산참사 7주년이 되는 해다. 마석모란공원에 잠든 철거민 다섯 분을 만나 뵈러 가야 한다. 매년 추모제 때마다 함박눈에 곱게 덮여 있던 다섯 봉분이 눈에 선하다. 그때의 화기는 다 빠졌을까. 유가족분들의 꺼지지 않던 분노도 조금은 사그라졌을까. ‘3조원의 개발이익’, ‘한강르네상스’의 제물이 됐던 평범한 철거민들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 있다. 평범한 이들의 죽음을 제물로 삼고도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자 용산 4구역 투기개발은 그간 중단되었다. 서울 전역을 전염병처럼 돌던 재개발-재건축-뉴타운 사업들도 거개가 중단되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7년 전 그렇게 급하게 그 누구도 ‘진압’당하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고 올라간 망루에서 단 하루 만에 사람들이 함부로 불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