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점 없는 길이 뜨겁다. 젓갈처럼 온몸이 땀에 절여진다. 그러나 이 길을 멈출 수는 없다. 제주도 강정 평화대행진. 동진과 서진으로 나눠 제주도를 한 바퀴 걸어 제주시에서 만나는 5박6일 긴 여정의 첫날. 전국에서 700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어떤 이들은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하기도 했다. 공사가 강행돼 올해 2월엔 준공식까지 가졌기 때문이다. 2005년 ‘세계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된 지 11년째. 제주는 다시 동아시아 전쟁 전진기지로 나아가는 첫발을 떼었다. 막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모여들기도 했다. 아예 주소지를 옮겨 강정 주민이 된 지킴이들도 있었다. 2007년 강정마을 주민들 1900명 중 단 87명이 참석한 무늬만 마을총회에서 불법적으로 통과..
양말 세 켤레를 챙겨 나갔다. 서울광장에 있던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의 분향소를 현대차 본사 앞으로 옮기는 꽃상여 100리 길이었다. 초라한 영정. 테두리 4면엔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저 영정이 경찰들 발에 짓밟히던 날, 내 안경도 짓밟혔다. 무슨 아우슈비츠의 형무소도 아닌데 추위를 피할 비닐 하나도 반입 금지였다. 궁여지책으로 대형 쓰레기봉투를 사서 쓰레기처럼 몸을 구겨넣고 자는데, 그것마저 뺏어가는 세상이었다. 첫날은 국회 앞에서 1박이었다. 마침 20대 국회 개원 날이었다. 19대 국회 당시 은수미 의원 등의 노력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유성기업과 청와대, 국정원, 검·경, 현대차 등이 유착해서 자행한 부당노동행위의 실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지금까지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검·경의 비호 ..
구의역 9-4 승강장엘 다녀왔다. 지난 5월28일 이곳에서 한 외주하청 청년노동자가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협착사를 당했다. 그의 작업가방엔 미처 끓여 먹지 못한 컵라면 하나가 있었다.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에만 벌써 세 번째 일어나는 참사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처럼 평범한 이들의 연대와 항의의 발걸음이 구의역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작은 추모의 포스트잇이 역사 곳곳에 나붙기 시작했다. 비로소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둘러싼 온갖 부패와 비리와 불의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국토부에서도 외주화는 안된다고 했지만 강행됐다. 관련 사업 경험이 없고 설립된 지 3개월도 안된 회사가 경쟁입찰에 단독 입찰해 수주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씨와 서울메트로 사장인 강경호, 해당 업체인 유..
지난주 토요일엔 오랜만에 야전용(?) 음향트럭 위에 올라 시낭송을 했다. 현대·기아차 본사 정문 앞. 역시 대한민국 최고 재벌을 대하는 국가의 예 의는 각별했다. 주변이 온통 경찰병력으로 새까맸다. 해산명령 3차가 지나 검거가 임박했으니 주변 기자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라는 자상한 경찰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회를 시작하기도 전 정문 앞에 임시로 꾸린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분향소에 조문하려는 노동자, 시민 17명이 연행된 바로 직후였다. 또 그럴까 싶어 나도 특별한 내용의 시를 준비했다. 언제부터인가 기자회견, 문화제, 추모제를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듣게 되는 그 ‘해산명령’을 한번쯤은 희화화하고 싶었다. 제목은 ‘노동자 민중의 해산명령 1호’였다. 온갖 공유지를 사유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와..
잘 지내시는지요. 문득 형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SNS로 전 세계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데 웬 구닥다리 편지냐고요. 하지만 밤새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쓰고 우체국을 찾아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편지를 쓴다는 건 봉인된 마음 한 갈피를 전하는 귀한 일. 1년 내내, 아니 삶의 남은 시간 동안 이런 편지만 쓰며 살아도 좋겠습니다. 어떤 효율과 이윤도 낳지 못하는 불용한 시간. 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고귀하게 여기는 ‘사랑’이나 ‘우정’ ‘믿음’ ‘신의’ ‘응원’ 같은 것들을 나누고 새긴다면 그보다 소중한 인간의 시간이 있을까요. 언제부터인가 자본의 이해를 위한 생산성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 바쁘게 살고, 힘써 일을 해보지만 다수는 도리어 간신히 생존하며, 일할수록 가난해지고, 고독해집니다...
금요일엔 ‘파견미술팀’들과 함께 대전 유성에 있는 ‘아트센터 쿠’엘 다녀왔다. 28일부터 작고한 ‘천재 조각가 구본주’전이 열리는데 작품 설치를 돕기 위한 나들이였다. 대부분 쇠 작업에 작품들 크기가 만만하지 않아 10톤 트럭 한 대분의 작품들을 옮기고, 닦고, 설치하는 고된 노동일이었다. 10주기 성곡미술관 전시 때는 친구들 수십 명이 사흘 동안 일해야 했는데 다행히 이번엔 전체 작품이 아니기도 하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별이 되다’ 작품이 나오지 않아 우리끼리 천만다행이라고 수군거렸다. 대추초교 앞에 서 있던 ‘갑오농민전쟁’상도 이번엔 내려오지 않았다. 토요일엔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관련 현대차 본사 집회도 있었지만 시간을 내야 했다. 그렇게 중요한 전시전이냐고? 최소한 우리에게는 그렇다. 도착해..
1980년 5월 광주. 수많은 시민군들 속에 함평고구마처럼 투박하게 생긴 한 소년이 있었다. 광주기계공고 3학년 학생이었다. 사람들이 맞고 끌려가고, 죽어가는 야만의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들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들었다. 장갑차에 올라보기도 했다.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모두 그러했다. 상무대에 즐비하게 누워 있던 시신들. 그 5월을 소년은 끝내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에 소년은 노조 위원장이 되어 서 있었다. 광주에서처럼 다시 머리 위로 헬기들이 날고, 테이저건과 곤봉과 전기충격기로 중무장한 테러진압부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77일 옥쇄 파업하는 동안 동료 노동자 가족들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다. 자신과 함께 일하던 노조 정책..
“송 시인, 신부님께 드리는 시 안 써왔어!” 준비 못한 줄 알면서 사진가 노순택이 짓궂게 나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래, 즉흥시라도 해봐.’ 다른 벗들도 덩달아 나를 궁지로 몬다. 그렇잖아도 신부님 찾아뵌 게 언젠지 죄송해 술잔만 비우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 “시가 뭐 자판기도 아니고… 안 돼요” 하면서 신부님 얼굴을 살피니 ‘네 놈에게 내가 뭘 기대하겠니’ 서운함이 역력하다. 어떻게 이 곤경을 벗어나야 하나. 이럴 땐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제일. 마당으로 나오니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 하나 덩그러니 걸려 있다. 지금은 제주도 강정마을로 아예 거처를 옮기셨지만, 이곳 군산에서 정신지체 아이들을 가족 삼아 ‘작은 자매의집’에서만 21년을 사셨고, 지금도 ‘평화바람’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이 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