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 먹을 만큼 푸성귀며 잡곡 따위를 길러 먹는 작은 밭이 있다. 이웃 할매가 매실나무를 심어 놓았던 밭인데, 그것을 마치 물려받아 농사짓듯 밭농사를 시작한 게 다섯 해쯤 되었다. 밭이 생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빼곡히 심은 매실나무를 얼마간 베어내서 채소나 곡식 농사 지을 자리를 마련한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밭머리나 밭가로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일나무를 심은 일이었다. 해마다 한두 그루씩 더 심어서 이제 밭에 있는 과일나무만 해도 매실, 앵두, 자두, 복숭아, 살구, 사과, 감, 석류, 다래, 모과, 유자. 그러니까 늦봄, 앵두를 훑어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울 유자가 날 때까지 밭에 있는 한두 그루에서 열리는 열매만으로도 한 해가 간다. 아이들은 으레 밭에 가면 무엇 따먹을 것이 없는지부..
지금이야 장맛비가 시작되었으나 지난주까지만 해도 가뭄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밭에 물 주는 일이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이었다. 물은 농사에 절대적이다. 건강한 흙에 물만 있으면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을 다 만들 수 있지만 물 주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물은 아침과 저녁에 줘야 하고 뜨거운 낮에 주면 도리어 농사에 해로울 수도 있다. 물도 아무 물이나 주면 안된다. 밭에 물을 주다가 갑자기 송곳이 필요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구멍으로 물을 흘리는 ‘점적호스’의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 나와서다. 철물점에 가면 1000원에 송곳 두 개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은 사지 멀쩡한 농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 직접 만들기로 했다. 특히 최근에 유발 하라리가 쓴 를 다..
“예물, 비싼 걸 해야 되나? 장모님 될 분이 고민한대요.” “그런 거 하지 말자 그래.” 말해 놓고 생각해 보니 ‘예물이 뭐지?’ 하고 궁금했다. 옛날 내가 아내와 결혼할 때도 아무것도 안 했고, 자식 혼사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르는지라 예물을 주고받는 걸 알 턱이 없다. ‘예물이 뭘까?’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예물은 결혼반지 같은 패물을 뜻하고 예단은 이불 같은 현물 또는 현금이라고 한다. 본래 예단은 신랑 측에서 신부 측으로 비단을 보내면 신부가 그 비단 천으로 손수 바느질해 시부모 옷을 지어 보내는 것이었다. 옛날엔 옷을 직접 지어 입어야 했기 때문에 여자들의 바느질 솜씨가 중요했다. 며느릿감의 바느질 솜씨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데서 유래한 풍습이었다. 그러면 시부모는 수공비를 신..
8년 된 토스트 가게가 있다. 가까이 초·중·고가 있어 주인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다. 아이마다 꼭 앉는 자리와 먹는 곁두리가 있었다. 누가 여기 앉고 저기 앉았는지, 누가 슈감자와 와플, 소시지를 좋아했는지 속속들이 훤했다.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 가운데 주문할 수 없는 아이가 눈에 띄면 아주머니는 먹고 싶은 걸 물어 만들어준다. “왜 나는 공짜로 안 주느냐”고 누가 불평하면 이렇게 말한다. “이건 공짜가 아냐. 마음을 심는 거야.” 오늘 먹은 음식이 뒷날 다른 사람에게 아이가 전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외로워 죽겠어요. 난 외로워 죽겠어요.” 하루는 철판에 토스트를 굽는데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말했다. “왜?” 흘려듣지 않고 물었다. 들어보니 주중에 아무..
“황금쌀이라고, 뭐 몸에도 더 좋다 하고, 소출도 좋다던데. 자네, 들어봤나?” 유전자를 조작한 GMO 쌀이 있다는 소리는 그렇게, 동네 밥집에서 얻어 들었다. 황금쌀이 좋다고 들었는데, 볍씨를 구하기가 마땅찮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GMO 작물이라면 식용유 만드는 데 쓰는 콩이나 옥수수, 목화, 유채(캐놀라), 감자 따위를 외국에서 재배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쌀도 GMO 종자가 있었다니. 얼마 전 식품 포장에다가 재료가 GMO 작물인지 아닌지 표시하는 법을 바꾼다는 소식이 있었다. 식약처에서는 마치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처럼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반대다. GMO 작물로 만든 먹을거리여도 표시를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많고, 게다가 국내에서는 GMO 작물 재배를 하지 않으니까, G..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했어? 너 몇 살이야?” “당신이라고 하지 그럼 여보라고 해?” 며칠 전에 보게 된 말다툼 현장에서 오고 간 얘기다. 자동차 주차문제로 벌이는 말다툼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마는 몇 살이냐고 되묻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나이로 줄을 세운다. 나이가 아니면 직위나 직업, 그도 아니면 전직이 뭐였는지에 따라 사람에 대한 호칭이 달라진다. 네댓살 차이가 나는 나이를 확인하고 나면 말 놓겠다든지 친구하자든지 하면서 갑자기 아랫사람 취급에 들어간다. 직책을 놔두고 ‘씨’라고 부르면 하대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얼마 전에 내가 일을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자고 했었다. 누구는 그 단체 소속의 위원회 위원장이고 누구는 다른 단체의 회장이고 누구는 나이도 많고 경륜도 있..
얼마 전 옛날 회사 동료의 아들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1990년 초반에 버스 운전을 할 때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그런데 문○○이 와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놈. 어떻게 여기를 왔을까. 동료들이 그동안 이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은 버스회사 노동조합 조합장이었다. 문은 회사 관리자 행세를 하면서 동료 기사들을 자기 부하처럼 취급했다. 회사는 도로가 막히는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운행 ‘탕수’만 채우려고 난폭운전을 조장했는데 문○○은 회사에 아부만 했다. 게다가 회사는 기본급이 곧 통상임금이라고 주장하면서 야간, 연장근로 수당을 일부 떼먹었다. 나는 기사들의 임금을 제대로 받게 하기 위해 노조를 찾아갔지만 문은 나를 무시하면서 단체협약도 보여 주지 않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늘 지나는 길이었다. 첫 번째 네거리에서 버스가 왼쪽으로 돌자 아파트 단지 담벼락 위 하얀 철제 난간 사이로 붉은 장미꽃들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 하루 새 피었을까, 아니면 내가 무심해 몰랐나. 잊지 않으려 휴대전화기에 5월14일을 적어두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서는 건넛집 대문 옆 담벼락을 넘은 장미에 다시 화들짝! 아침에 보고도 못 본 게 분명하다. 그 뒤, 무장 장미가 눈에 띄었다. 해마다 5월15일, 스승의날 앞뒤로 장미가 폈던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으나 올해 장미를 처음 본 날이 5월14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앞으로 스승의날 무렵 장미가 핀다고 기억할 거다. 이제껏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굳이 어떤 날을 정해 그것도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