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그림 원고 뭉치를 받았다. 두툼한 파일로 몇 개. 10여년 동안 다달이 꼬박꼬박 연재되었던 그림이라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고기, 짐승, 풀과 나무, 살림살이, 마을의 집들, 소리와 맛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그림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작은 그림 하나에 담겨 있었다. 단순하고 아름답고 유쾌했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우리말 이름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일본어로 뜻과 우리말 소리가 적혀 있었다. 10월 초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 ‘파주북소리’의 프로그램 가운데 홍영우 화가의 그림책 원화 전시회가 있었다. ‘온 겨레 어린이가 함께 보는 옛이야기’라는 주제로 10년 동안 그린, 20권의 그림책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홍영우 선생이 올 수 있었다. 모두들..
글쓰기 강연을 가끔 한다. 사람들은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그 이유와 동기는 참 다양하다. 자기소개서를 잘 써서 취직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책을 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자기 삶을 기록해 놓고 싶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글을 못 써서 직장 상사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 ‘복수’하려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나는 1985년부터 2005년까지 버스 운전을 했다. 그 당시 시내버스 기사들 근무여건은 너무 열악했다. 임금이 너무 적었고 쉴 시간이 없었다. 사업주들의 욕심 때문에 운행시간이 너무 짧아 정해진 시간에 노선을 돌아오려면 난폭운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
비가 온다고 해서 들깨 타작을 서두르는 날이었다. 베어 놓은 지 4~5일 지났는지라 잘 말라서 ‘가빠’를 깔고 한 곳으로 모으는데 따가운 햇살이 새삼 고마웠다. 들깨를 벨 때는 이슬이 덜 깬 이른 오전이 좋지만 타작하기에는 햇살 따가운 오후가 좋다. 옮기기 좋게끔 반 아름 정도씩 끌어모으는 때도 그렇고 그걸 양팔에 안고 올 때도 그렇다. 무척 조심스럽다. 깨알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니까 충격이 가지 않도록 걸음도 사뿐히 걷는다. 내려놓을 때는 반대다. 소리 나게 턱 내려놓는다. 한 알이라도 털어지라고. 들깨를 벨 때도 조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낫을 예리하게 갈아서 들깨 밑동에 댄 채로 비스듬히 당겨 올려야 깨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충격이 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이보다 더 조심하는 단계가 있다. 들깨 베..
십년 전, 페루에서 국가폭력, 학살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아야쿠초’라는 마을 이름이 보였다. 리마에서 꽤 떨어졌고 더 가면 마추픽추다. 민박 주인이 왜 마추픽추에 안 가냐 했다. 이미 알아버린 이름, 아야쿠초 때문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나섰다. 버스가 밤새 달려 아침 무렵 아야쿠초에 다다랐다. 한 건물 바깥벽 그림이 눈에 띄었다. ‘기억박물관’이다. 3층 전시실에는 희생자 생전 사진, 마지막에 입은 옷, 학살 현장 사진, 그림, 조형물, 한 여성이 “왜 내 아들을 죽였는가?”라고 쓴 팻말을 든 사진, 부모나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 진실을 밝히려 20여년 투쟁한 여성들의 사진, 지나온 과정 기록이 있었다. 담당자한테 설명을 듣다 왈칵 울었다.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
“이보게, 전샌. 작년에 쌀값이 1할 빠지더니, 올해는 거기서 1할이 더 빠졌네. 그것도 농협에 낼 수나 있으면 다행이라고. 이제야 타작하는 게 시작인데. 어찌될지 몰라. 내가 전샌 앞에 두고 돈 치르는 얘기 말고 할 게 없네.” 괭이질해서 논두럭 올려붙이는 것, 논에 물길 내서 물 대고 빼는 것, 풀 맬 때 손 놀리는 것, 거름 장만해서 논에 넣는 것. 어느 것이든 하는 모양새가 엉성하다 싶으면 손수 해 보이시고, 일러 주시던 어르신이 경운기에 나락을 싣고 농협에 다녀와서는 기운이 없다. 수매를 마치고 온 이웃 어른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쌀이 남는다고. 농사짓는 땅을 버려. 쌀 남는 게 농사가 많아선가. 남의 양식 돈 내고 사다 먹는 일이 하, 언제까지고 그러겠나. 배 곯으면 양식 앞에 댈 게 ..
일요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백남기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백남기씨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뒤 중태에 빠져 316일 동안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경찰이 서울대병원의 모든 출구를 봉쇄했다는 소식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검찰이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강제로 침탈할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올라왔다. 시신을 부검하려는 이유는 뻔하다. 물대포를 맞아서 죽은 게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거다. 수술할 때 이미 담당 의사들이 외부 충격에 의한 출혈이라고 진술했는데 뭘 부검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수많은 시민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을 보지 않았는가.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그렇게 직사했는데 어떤 사람이 버텨내겠는가. 무엇보다 살..
이번 추석에는 우리 식구만 셋이 모이게 되어서 진짜 제대로 된 차레상을 차리고 싶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겪었던 의미 없는 의례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들 때문에 명절 자체에 흥미를 잃어왔던 터라 내 소신과 내 정성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는 미리 알아본 바가 있는지라 그 도움말대로 하나씩 준비했다. 내가 알아본 것은 두 방향이었다. 하나는 차례가 아니고 차레라는 것이다. 차례(茶禮)는 한자말의 훈에 있듯이 차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는 것으로 물이 탁해서 늘 차를 달여 마셨던 중국얘기이고 앞 뒷산에 약수가 철철 흐르는 우리나라는 차례가 아니라 차레를 했다는 것이다. 차레는 채우고 비운다는 뜻이다. 모든 제례는 결국 채우고 비우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워내고 나서 채우는 게 아니라 맑고 ..
서울 동교동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몇 번 꺾어 들면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이 나온다. 그곳 지하 1층 국제회의실에서 지난 9월1~2일에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제3차 청문회가 열렸다. 큰 주제는 ‘4·16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조치와 책임’이었다. 들을 청, 들을 문. 청문회는 증언을 듣는 자리다. 당연히 말해야 할 이들이 있어야 한다. 말하는 이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먼저 다짐해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가 ‘국가의 조치와 책임’에 대해 따지려 참사 당시 해경·해군·해수부·경찰청·청와대 관계자에게 증인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한 명도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방청인 발언에 나선 김성묵씨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