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부터 45일에 걸쳐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국정조사라는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 파동이 벌어지던 지난 몇 주를 돌이켜볼 때, 야권에서 제대로 된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여권과 국정원이 이른바 ‘NLL 포기 발언’을 폭로하면서 만들어낸 ‘안보 프레임’을 이겨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킨 곳이라며 한마디 거들고 나섰지만, ‘그럼 우리나라를 지키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 앞에서 야권은 할 말을 잃는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절차 대 안보’..
지난 5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시에 프랜차이즈 분야 ‘불공정피해상담센터’가 개소됐다. 서울시는 중앙정부도 미처 신경을 쓰지 않던 시기에 청년고용할당제와 표준이력서를 도입하고, 대형마트 상생품목을 발표했으며 서울형 기초보장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개별 정책에 대한 호불호와 평가를 떠나 이러한 정책은 과히 선도적이라 할 만하다. 적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 집행에서만큼은 할 수 있는 근거보다, 안 되는 이유가 더 많은 한국 사회에서, 중앙정부도 아닌 지방정부가 그러하니 말이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지방정부의 역할이 아니라는 등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재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불공정피해상담센터의 상담예약이 꽉꽉 들어차는 걸 보면,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중앙정부..
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신호대기 중에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김밥 한 줄을 손에 쥐고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아이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능숙하게 은색 호일을 벗겨가며 김밥을 먹었다. 보는 내가 다 목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그 아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김밥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꽤 오래전 영국에서 잠시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출근 첫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를 열고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그릇에 담고 각자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면서 밥을 먹는 게 아닌가? 아침 티타임에..
필자는 어릴 때 불만이 많고 이것저것 따져 묻기를 좋아해, 대부분의 전래동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황희 정승이 나오는 것들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너도 옳다, 그래 너도 옳다, 아니 이런 네 말도 옳다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해줘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택해서야 쓰겠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억이 난다. 이 문제의식에는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모두 제한적인 경우에만 옳다. 모든 발화 주체에게는 나름의 문제와 결격 사유가 있겠지만, 매 순간에는 주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격 따위를 따져 묻기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간베스트’(일베)라 불리는 사이트에 대한..
어느새 운전을 하게 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운전은 신세계였다. 처음 차를 몰고 거리에 나선 날의 두려움과 설렘은 물론이고 음악을 크게 틀고 창문을 내리고 달렸던 여름밤, 뺨에 와 닿던 바람의 느낌까지 생생하다. 당연히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많았다. 3일 만에 어처구니없는 접촉 사고를 내 뒷목 잡고 내린 앞차 운전자와 합의를 봐야 했다. 라이트를 끄고 내리는 것을 잊어버려 차를 방전시키고, 기어를 D에 놓고 시동이 안 걸린다며 패닉에 빠져 긴급 출동을 부르는 건 가벼운 축에 속했다. 한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돌아다녀 보다 못한 옆차 운전자가 와서 꺼주기도 했고, 라이트가 고장난 채로 밤에 고속도로에 진입했다가 기겁한 적도 있다. 실수가 줄어들고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나름..
6월3일은 ‘무주택자의 날’이다. 1992년 ‘주거권 실현을 위한 시민연합’에서 이날을 무주택자의 날로 정하면서 매해 철거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거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행사를 해왔다. 하지만 주거권으로 실현되는 생존권의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3년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전셋값이 너무 올라서 그는 자기가 가진 돈으로는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조그만 방에 월세로 살자니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내게 혼인신고를 해줄 수 없겠냐고 했다. 낭만적인 프러포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혼인신고를 하면 정부가 보증하는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보증금을 모으지 못해 창문 없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언..
5월5일 밤 10시43분. 대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한 남성이 문구용 커터를 꺼내들고 자신의 생식기 중 일부를 잘랐다. 이 황당무계한 자해사건을 일으킨 김모씨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로 32세다. 사건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그는 역무원 및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는 부위를 절개했지만,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씨는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있었고,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 본인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육체에 상처를 내면서 쾌감을 얻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자해사건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잊을 만하면 ‘독도는 우리 땅’ 같은 자명한 메시..
다섯 번째 책을 내놓은 소설가를 만났다. 작업실이 따로 없는 그녀는 주로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창가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커피숍에 가야만 좋은 글이 써질 것 같은 조바심이 이는 게 아닌가?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숍으로 달려갔는데 웬걸, 생각보다 사람이 꽤 많다. 탁 트인 2층, 중앙에 배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동영상을 즐기거나, 수다를 떤다. 적당한 조도의 개별 조명을 갖춰 공부하기에 그만인 테이블은 학생들 차지다. 앞자리 여자분은 노트북을 켜고 입사 지원을 하는 중이고, 옆 테이블에서는 중간고사 대비 시험공부가 한창이다. 소규모 커피숍과 달리 ‘세월아 네월아’ 앉아 있어도 눈치 줄 사장도, 추가 주문에 대한 부담도 없다. 은은한 커피향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