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길은 험난하고도 지난하다. 검찰 수사도 모자라 검찰수사심의위원회의 자문을 받아야 하고 수사 결과에 이의가 있으면 항고심사위원회도 거쳐야 한다. 이미 끝난 사건도 특별수사팀, 특임검사를 임명해서 재수사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특별검사도 가동된다.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기도 하고 한 번으로는 끝내지 못하고 삼세번 재판을 받아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기나긴 과정을 거쳐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면 사건은 종결되어야 하지만 불신과 비난, 논란이 재점화되기도 한다. 납득이 안 된다며 대법원 앞에서 시위도 벌인다. 훗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오판이 확인되어 재심도 열린다. 형사소송을 하는 이유와 목표가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면 확정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진실은 발견되어 확정된 것이니까 그 확인된 진..
어쩌다 작품 합평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권장한다. ‘한 가지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 ‘인간은 긍정적 신호보다 부정적 신호를 다섯 배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물론 기계적 균형을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
그저 넓고 큰 것을 좋아하는 게 세태라지만 산들은 좁은 곳을 지향하면서 하늘이라도 찌를 듯 오르다가 마침내 정상을 완성한다. 그래서 이 높이를 획득하고, 저 깊이를 아래 세상으로 훅 찔러넣는다. 소백산 오르는 길. 죽령-소백산천문대-연화봉-비로봉으로 간다. 그 이름이 대백(大白)이 아니라 소백이어서 크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는 산. 사람들이 태풍을 무서워하고 여름의 더위를 걱정하는 동안 벌써 식물들은 해야 할 일들을 착착 수행하고 있다. 열매는 여지없이 모두 둥글고, 잎은 더욱 둥그렇게 변해간다. 나무의 줄기도 각진 것이 없다. 물론 소백산표 꽃들도 동그랗고 무척 크다. 천문대 곁을 지나가자니 이런저런 둥근 것들과 연결되면서 문득 떠오르는 궁리가 있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무량한 허공을 헤엄쳐 와서 물질..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은 말일 뿐이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엔 말뿐인 사람들만 넘쳐나고, 아무리 소리쳐도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8월 개봉 예정)을 보고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1975년 기업들에 폭탄테러를 가한 일본의 무장 운동 단체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에서만 8명이 죽고 300명이 다쳤다. 언론은 이들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생각 없는 폭탄 마니아’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테러에는 현재의 상황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
경희대 태권도학과. 역사와 전통에 빛나며 태권도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도 크다. 태권도 시범단을 운영하면서 세계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만 단원이 될 수 있었다. 빛이 크다고 꼭 그림자도 클 필요는 없는데, 이 학교 시범단에서 폭력사건이 터졌다. 선배들의 구타를 견디지 못한 피해 학생들이 부모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지간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참으려 했단다. 하지만 정도가 심했다.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구타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때리는 이유도 황당했다. 기강이 해이하다거나 손발이 맞지 않는다고 때렸고, 격파용으로 사온 사과가 예쁘지 않다고 때렸다. ‘선착순 집합’은 보통 2~3㎞씩 달리게 했다. 학교당국은 꿈쩍도 안 했다. 폭행을 훈련 과정에서 ..
아주 뒤늦게 한문을 배우려고 전문기관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공자와 맹자가 내겐 너무 버거운 노인이었다. 임서(臨書)라면 노안 탓이라도 하겠는데, 시험에서의 모자란 실력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나에게 남은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 시험이 마지막일 테니 불합격자의 꼬리를 떼지 못한 채 그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잘 안 되기는 무지 쉽고, 잘되기가 너무나 어려운 곳임을 예전에 알았다지만 야속한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겠다. 어찌하겠나 ‘아니 불(不)’의 위력을 미처 챙기지 못한 나의 이 불민함. 어쨌든 나중에 호주머니 없는 옷을 걸치고 빈손으로 가야 할 때, 돈은 물론 명예나 위신 따위도 가져갈 수 없음은 나도 안다. 아무리 ‘아니 불’의 행패가 심하다고 하나 그..
서울은 글로벌 도시다. 청와대와 국회라는 정치의 중심이 있다. 여의도부터 종로까지 금융산업과 언론이 넓게 펼쳐져 있다. IT 산업과 첨단 제조업도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인 서울 주요 대학’이 있다. 인적 네트워크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에 살아야 ‘정보’에 밝아진다는 말도 사실이다. SK하이닉스는 인재 확보 때문에 공장마저 수도권으로 진입시켰다. 젊은 고학력 고소득자들의 서울 선호는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은 가장 고학력의 다양성을 가진 인구가 몰려 있는 창조 도시다. 퀴어퍼레이드, 촛불시민과 태극기부대가 충돌사태 없이 집회를 마칠 수 있는 곳이다. 서울 선호의 욕망은 별난 게 아니다. 신도시 건설로 대표되는 교외화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직장인들은 30분 이내로 서울 직장에 통근이 가능한 직주근접을..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능선은 완만하고 두툼한 산길이었다. 배가 불룩한 황소의 등에라도 올라탄 듯 능청능청 기분 좋은 산행이 이어졌다. 이 높은 지대에 웬 물일까.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물기가 촉촉한 곳이면 어김없이 멧돼지의 소행인 듯 흙이 마구 파헤쳐졌다. 단단했던 땅이 깊은 상처를 입고 흙으로 변해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검게 번들거리는 흙을 가볍게 한 줌 쥐어 보고 지나쳤는데 꽃동무가 어깨를 툭 치더니 말라가는 풀솜대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멧돼지한테 받혀서 뿌리째 뽑힌 것이니 가져가서 한번 키워보시죠! 멧돼지는 무슨 말을 꺼내 놓으려 해도 나오는 건 고함과 신음뿐이다. 그 외마디 신호로 새끼를 키우고 식구들을 인솔하며 살림을 꾸려나간다. 어찌 할 수 없는 멧돼지가 마구 들쑤신 분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