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번째 사람이 있다. 심보선 시인은 바로 시인이 그렇다고 했다.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는” 거라고. 첫 번째 자리는 슬픔의 자리이지 글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관한 첫 번째 글은 두 번째 자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어찌 시인만이겠는가. 세상에는 시인 말고도 두 번째 사람들이 있다. 내가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 홍은전 작가도 두 번째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자리다. 첫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한데 두 번째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오래전, 코미디언 백남봉은 서울의 동네 이름으로 이런 만담 한 자락을 펼쳤다. ‘청량리’ 거쳐 ‘중랑교’로 가는 버스의 차장이 외치는 말은 너무도 빨라서 이렇게 들렸다는 것. “차라리 죽으러 가요.” 아직도 귀에 쟁쟁한 그 음성은 어쩌면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그 고단한 시절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으로 그냥 넘어가 주었다. 긴 연휴, 짧은 생각. 하루는 늘 하루 만에 오늘 저의 자리를 깔끔하게 비운다. 어느덧 마지막은 오고 두부처럼 네모난 방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한강 근처가 무슨 고원지대도 아닐 텐데 서울로 오는 것을 왜 상경(上京)한다고 할까. 고속도로 사정을 전하는 뉴스를 뒤로하고 서울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명절 뒤끝의 허전한 마음도 높은 곳이 아니라 그곳..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말은 감미롭게 들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이런 걸 보장해주다니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예전에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행복할 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싶다. 국가가 국민에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일일이 보장해줄 수 없다. 당신이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돕겠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다. 1776년 미국독..

나는 거창 출신이다. 빨갛게 익은 거창사과를 옆구리에 붙인 채 달리는 버스를 경부고속도로에서 만나면 힘껏 쫓아간다. 험상궂은 옆차들이 끼어들어 우리 사이를 훼방 놓을 때까지. 작년 봄 거제도로 특산식물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늑골 사이 묵은 먼지를 긁어내는 윤윤석의 아쟁산조가 끝나고 ‘세상의 모든 음악’이 시작될 무렵 인삼랜드 휴게소에 닿았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불에 구운 흰 가래떡을 입에 물고 내 자리를 찾아가는데 방금 도착한 거창여객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같은 햇볕을 쬐고 비슷한 성분의 물을 먹어서인가. 한 골짜기에서 뒹구는 돌멩이처럼 다들 닮은 인상이다. 아버지 모시고 갈 때 인삼랜드, 어머니 업고 갈 때 인삼랜드. 그 언젠가 이 휴게소에서 나만 못 내리는 상황이 오겠지. 그런 날도 가늠..
비대면 강의로만 진행된 한 학기를 마치고, 새로 시작된 2학기. 제한적이나마 대면 수업을 할 수 있게 됐다. 3년 동안 강의했던 경험을 생각해보건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자신도 있었다. 2020학번 1학년 첫 대면 강의를 하러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소위 ‘멘붕’이 왔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멀뚱멀뚱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처음 본 친구에게 비말이 튈까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출석을 부르며, 침묵 속에서 학생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데도 등허리에 땀이 흘렀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지침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질문에 대답하고 대화에 응하는 몇 명의 학생을 확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뭔가를 써보라는 과업을 주고 학생들을 ..

‘검찰개혁’은 마법의 주문이다. 무슨 공격을 당하든 맥락과 상관없이 “지금 검찰개혁이 시급한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면 답변이 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면,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검찰개혁이 중요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라는 반박을 듣는다. 현직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해서도, “추미애가 무너지면 검찰개혁이 날아가고, 결국 문재인 정부 위기로 간다”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언론에서도 은연중에 조국 전 장관이나 추미애 장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검찰개혁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검찰개혁보다는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한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개혁에 저항한다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나는 ..

내 나이 마흔을 칠 때 처음 지리산에 올랐다. 이틀간 산장에서 밥도 먹고 밤도 건너야 했기에 준비물이 상당했다. 취사도구, 쌀, 밑반찬과 더불어 소주와 돼지고기. 우연히 을 들추다가 옛 선비들의 행장을 보았다. 짐꾼이나 하인의 수발에 의지했겠지만 지필묵은 꼭 챙기는 물목이었다. 이후 가파른 나이를 먹어가면서 산의 경사를 받아들이고 나름 즐기는 생활을 꾸려나간다. 산에서 걷고 먹는 것에 더해 보는 것에도 유의하려니 단출한 차림이다. 배낭이 퍽 가뿐해졌다. 근래에는 산에 갈 때 세 권의 고전과 동행한다. . 도무지 모르겠는 그 난해한 내용 중에서 우선 대강의 뜻을 하나 붙잡는다. 중용이 말하는 성(誠)의 개념을 가지고 보면 산이 조금 달리 보인다. 반짝이는 꽃, 일획의 나무, 분주한 곤충. 이들의 어울린 행..
불공정에서 촉발된 촛불혁명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이 지금은 역설적으로 불공정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불공정의 크기와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입은 상처는 만만치 않다.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가 정점인 줄 알았더니 뒤이어 추미애 법무장관도 자녀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검찰개혁 추진을 저지하려는 세력의 기도된 의혹 제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집요하게 파헤치는 야당과 언론의 흔들기로 그들의 도덕성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거대 여당에 맞설 무기와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야당은 호재를 만난 듯 인사청문회와 그 이후 몇 달째, 국회 대정부질문 내내 열을 올리고 멈춰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론도 하루 1000개가 넘는 기사를 쏟아내며 정쟁의 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드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