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CBS PD가 2015년 11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과 광주 유가족의 만남을 묘사한 글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까지는 광주에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몰랐다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미안해했고, 우리가 안산으로 가야 했는데 광주까지 오게 했다고 광주 유가족들이 미안해했다. 이들의 만남에 동행한 정혜윤 PD는 이렇게 적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슬픈 자들이, 가장 고통받는 자들이 오히려 책임을 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참사가 일어난 현장이면 어디서든 재확인된다. 과거사·의문사 피해 유가족들이, 산재 유가족들이,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다. 죽..
머릿속이 아득하고 마음이 혼란스럽다. 이태원 참사로 7일 기준으로 156명 사망하고 197명이 부상을 당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10시15분부터 30일 0시56분까지 119에 도움을 요청한 신고는 100건에 달하며, ‘압사’란 단어를 직접 언급한 신고는 19건이나 된다. 오후 10시15분부터 약 10분 동안 14건의 신고가 들어왔고, 10시21분 이후에 들어온 6건 신고는 글로 옮길 수도 없을 만큼 참혹하다. 그런데 용산경찰서장은 차량이동을 고집하다 오후 10시55분을 넘어 이태원 파출소에 도착했다. 길이 막혀 차량에서 내려 참사 현장으로 오는 서장의 모습은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아니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뿐 아니다.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 상황관리관의 보고 태만..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관해 공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너무나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과받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8년 전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했다. 사과와 책임은 면책의 동의어였고 탄압의 계고장이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를 읽던 중이라 더욱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간을 복기하며 괴롭던 때였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주요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데 실패해왔다. 동시에 사법적 책임 묻기의 한계도 알게 됐다. 한계를 넘어설 방법은 아직 모르겠는데 정치적 책임 묻기는 벌써 실패했다. 박근혜는 파면되어야 하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
정부가 과로사회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30인 미만 기업의 추가연장근로제 시한을 2년 더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해외 건설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생겼을 때 주 64시간 이내까지 연장노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무한 노동으로의 질주를 보는 듯하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할 상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모르겠다. 저임금, 영세, 고령, 간접고용, 여성 등 취약노동자에게 더 가혹한 상황이 될 것 같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장시간 노동 문제는 오래된 이야기다. 병원 간호사, 판교 IT 개발자, 유통 판매직 노동자 4명 중 1명은 52시간 이상 일한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크런치 모드와 같은 집중 업무는 IT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대표적 문제점 ..
사안 자체에 압도당할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여,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 모든 고통을 잊고 자유롭고 평온하시기를.” 2022년 가을, 서울이란 대도시 한복판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참사가 이어졌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는 지하에 있는 집이, 선선한 가을밤에는 인파가 몰린 이태원 거리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다지 위험하다고 여겨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파도가 거친 새벽 바다도 아니었으니까. 어느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특히 그 거리에는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 했고, 수시로 찾아가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게 그곳은 삶의 터전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그 밤이 지났고,..
식구들 모이는 날은 콩이나 보리를 넣어 잡곡밥을 주로 하지만 이맘때는 ‘쌀밥주간’이다. 햅쌀밥에 명란을 얹어 먹는 건 나의 호사, 햄구이 한 조각 얹는 것은 아이들의 호사지만 햅쌀의 차진 밥맛에 바치는 헌사로 잠시나마 세대 통일을 이룬다. 수확철을 맞아 자못 다복한 식사 풍경이 연출되었으나 우리 쌀의 처지는 몰릴 대로 몰렸다. 여느 해와 달리 ‘쌀’ 하나로 모든 정치인들과 대통령까지 한마디씩 보태는 중이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는 국민적 관심도 높은 편이 아닌 데다 농어촌에 정치적 기반을 둔 여야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곤 해서, 대체로 순둥순둥했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는 쌀값을 놓고 여야가 상임위원장의 의사봉을 낚아채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상정해서다. 초과..
몇해 전 몇몇 유럽 국가에서 시작된 극우 돌풍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 극우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집권은 또 다른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이 녹색당 돌풍에 꺾였고 프랑스에서도 박빙이었지만 마린 르펜을 누르고 에마뉘엘 마크롱이 연임했다. 그럼에도 유럽 내에서 극우 정당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의 형제들’을 창당한 조르자 멜로나가 이달 말 취임해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예정이다. 9월 중순 치러진 스웨덴 총선에서는 ‘스웨덴민주당’이 득표율 20%를 넘기며 제2당에 올랐다. 우파연합 연정에는 스웨덴민주당이 제외되었지만, 우파 부상의 여파로 마그달레나 안드레손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히는 등 파급은..
대한민국 소멸론이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합계출산율, 즉 15세에서 49세까지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 지표가 1.0이 안 된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단순 인구 재생산조차 어렵다. 2003년 대통령 직속 ‘인구고령사회대책팀’을 설치하고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까지 만들어 온갖 출산장려 정책을 펼쳤다. 2015년에는 하다 하다 지역별 가임기 여성 분포도까지 만들었다. 이전부터 내오던 통계였지만 저출산 위기를 시각화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지난 20여년 동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약 380조원의 재정을 투입했지만, 합계출산율은 계속 떨어져 2022년 현재 0.8 아래다. OECD 평균이 1.59인데 한국이 최하위이니, 사실상 전 세계에서 꼴찌다. 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