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대토(守株待兎).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바보 이야기를 들어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옛 법을 고수하는 것을 비판하는 성어다.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겨냥한 대상은, 입만 열면 요순시대를 들먹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말만 하는 유가 지식인들이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이 극단적으로 펼쳐지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옛날 성군의 교화정치를 주장한 맹자는 그 전형 가운데 하나다. 눈앞에서 온갖 불의와 무도함이 자행되는데 그래도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선하다고 외치고, 전쟁에 패해 땅을 빼앗긴 군주에게 정치는 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 드니, 말이 먹힐 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맹자를 마냥 비웃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왕 앞에서 한 치도 굽히지..
-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비유적인 표현인데다가 앞뒤 맥락 없이 남아 있어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지만, 대개 군자는 용도가 정해진 기구와는 달리 어떤 자리에서든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특정 기능에 국한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긴 하지만, 전문가가 각광받는 이 시대에 이것저것 두루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권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器)를 ‘고정되어 변할 수 없음’의 비유로 이해할 때 이 말의 의미가 좀 더 확장되어 다가온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칼로 두부 써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고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테니, 고정관념을 깨려는 역설적..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나자 그를 한 해 넘게 추적하여 찔러 죽이고 자수한 형제가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들을 극찬하고 오히려 숨은 인재로 인정했다. 효성을 권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충동적인 보복이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하고 오랜 시간 공력을 들여 복수를 완수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집요한 복수 이야기는 동서고금 많은 서사의 뼈대를 이루어 왔다. 자신을 죽도록 때리고 거적에 싸서 측간에 내던져 소변을 맞게 한 위제를 천신만고 끝에 죽여서 그 두개골로 요강을 만들어 썼다는 범저의 섬뜩한 이야기도 있다. 철저한 복수만이 원수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길도 있다. 출세한 한신이 옛날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만든 동네 무뢰배를 찾아서 등용한 것..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전히 관용의 자세다. 관용은 그저 착하기만 해서 자기주장 없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나이, 직급, 학벌, 성별, 인종, 지역, 혹은 종교나 정치적 신념 등이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내고 상대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관용이야말로 사회 곳곳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제나라 군주 환공이 노나라를 쳐서 대승하였다. 노나라 장공이 화친을 요청하여 협정의 자리에 마주 앉았는데, 갑자기 노나라 장수 조말이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빼앗은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어쩔 수 없이 승낙하자 조말은 순순히 비수를 내던졌다.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자 분노한 환공은 땅을 돌려주기는커녕 조말을 당장 죽이려 들었다. 환공을 모시고 있던 관중이 말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조말을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신의를 저버린다면 천하의 지지를 잃고 말 것입니다.” 환공이 분을 삭이고 약속을 지키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들이 제나라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환공의 입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한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력을 행사한다 해도 당장 문제 될 ..
조선시대 마포에는 뱀이 곧잘 출현해서 애를 먹이곤 했다. 거기 살던 어떤 이가, 하인이 큰 뱀 두 마리는 잡았다가 그냥 놓아주고 작은 뱀 두 마리는 잡아서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의아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큰 뱀은 영물이라서 죽였다가 앙갚음을 당할 수 있지만, 작은 뱀이야 그럴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요.” 대답을 들은 주인은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크게 악한 자는 힘을 장악하고 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작게 악한 자만 큰 벌을 받는다. 크게 선한 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 버리는 반면 조그만 선행을 베푼 자는 알려져서 큰 상을 받는다. 잔인무도한 살인을 일삼은 도척은 멀쩡히 천수를 누리는데 좀도둑은 담을 넘다가 잡혀서 찢겨 죽으며, 공자 같은 이도 제대로..
늙음은 늘 남의 것이었다. 젊은 싯다르타 왕자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노인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라고 외쳤다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의 눈에 노인은 본디부터 노인이었을 것만 같고 나와는 도무지 무관한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 늙어 보였던 사람들의 나이가 오늘 나의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늙어감은 이미 시작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진행만 있을 뿐 돌이킬 수는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늙어감 앞에서 옛사람들은 자위와 해학이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소세양은 머리가 벗겨지니 복건을 쓰기 편해 좋다며 호기를 부렸고, 이만백은 이가 빠졌으니 씹지 않고도 넘길 수 있는 술을 즐길 이유가 더해졌다며 너스레를 ..
대학의 책무가 연구와 교육이라는 ‘당연한’ 인식은 사실 역사적 산물이다. 중세 대학의 역할은 사람으로서의 품성과 문화적 소양을 익히는 교양교육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학이 ‘유용한’ 지식을 창출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커졌으며, 전문가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교양교육에 의한 인간 형성이라는 이상은 점차 약화되었다. 연구는 물론 교육마저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오늘, 대학의 위상은 급전직하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중도에 그만두고 만 대학이 지금 시대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대학의 운명이 기로에 놓인 것은 학령인구 급감에 직면한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더욱, 대학의 존립은 교양교육, 특히 고전 교육에 달려 있다. “우리의 목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