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묻는 질문에 민생과 국방, 신의를 꼽았다. 질문을 던진 제자 자공은 정변과 전쟁이 잦았던 춘추시대에 국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인물이다. 선택과 투자를 중시하는 사업가답게 그는 이 범범해 보이는 답변을 파고들어 우선순위를 매겨달라는 주문을 하였고, 이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 바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안위를 위한 국방, 생존을 위한 민생도 중요하지만, 군주와 백성 사이의 신의가 무너진다면 정치를 하고 말고 할 나라 자체가 성립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민생과 국방을 넘어서 그 성립 기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실리에 밝은 자공에게 도전적인 일갈이었을 것이다. 신의는 어디에서 오는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주가 백성을 버리지 않고 솔선수범해 죽음도 불사..
“재이는 국가의 잘못에서 생겨난다. 국가의 잘못이 싹트기 시작하면 하늘은 자연 재해로 경고한다. 그래도 변화할 줄 모르면 괴이한 변고로 놀라게 한다. 그래도 두려워할 줄 모르면 결국 하늘의 재앙이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군주라면 충신의 간언도 즐겨 받아들이거늘, 하늘의 경고를 받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동중서, ) 말도 안된다. 재해와 변고가 하늘의 경고라며 국가의 책임을 묻다니! 그런데 이런 논리에 따라 가뭄, 홍수, 천체의 이례적 운행, 혹은 전염병의 창궐이 있을 때마다 왕은 하늘에 잘못을 고하며 눈물을 흘리고 신하들은 하늘의 목소리로 왕에게 경고하는 풍경이 신라시대부터 끊임없이 있어 왔다. 일식과 월식이 변고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현상으로 이해될 만큼 천문학이 진전됐고, 전염병의 원인과 처방에 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공격을 당한 조나라 혜문왕은 백전노장 염파 대신 조괄에게 병권을 일임하는 패착을 범한다. 재상 인상여가 “조괄은 병법을 책으로만 공부했다”며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조괄은 전장의 현실을 무시하고 책에서 배운 이론에만 입각해서 군대를 운용하다가 대패하여, 40만의 조나라 군사가 생매장당하고 말았다.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 조괄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책상물림.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읽을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는 어두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21세기 대명천지에 현실과는 동떨어진 묵은 한문책만 뒤적이고 있으니, 책상물림도 이런 책상물림이 없다. 그나마 조괄이 공부한 것은 실용학문인 병법이었지만, 나의 공부는 실용과는 거리가 먼 인문학, 그것도 옛 사람들의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