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사용된 만큼 한자 가운데에는 꽤나 기구한 운명을 지닌 글자들도 있다. ‘비(匪)’는 원래 ‘대나무 상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니다’라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 글자가 없어서 음이 비슷한 ‘비(匪)’를 빌려 쓰다 보니 원래 뜻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 위해서 비(竹+匪)가 따로 만들어졌다. 자기 뜻을 잃어버린 비(匪)는 ‘비(非)’에 밀려서 부정사로도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게 됐고, 주로 ‘토비(土匪)’ ‘비적(匪賊)’ 등 악당을 가리키는 말로 전락했다. 급기야 ‘무장공비(武裝共匪)’처럼 섬뜩함을 주기 위한 어휘에나 쓰이게 되고 말았다. ‘비(匪)’가 악당의 의미로 비하되는 과정에 ‘비(否)’괘의 괘사인 ‘비인(匪人)’이 놓인다. 비인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행위가 부정한 사람’ 등으로 풀이..
맹자는 자신의 장점이 남의 말을 잘 아는 것이라고 했다. 말은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말이 그대로 그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안다. 말을 아는 것 자체보다,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맹자가 경계한 네 가지의 말은, 편견에 치우쳐서 객관성을 잃은 말,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들어서 절제하지 못하는 말, 못된 마음을 품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말,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본질을 회피하려는 말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옳음과 틀림, 진정과 거짓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맞으면 저건 틀리고, 어떤 말에 진정성이 있으면 거짓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것과 저것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진정성만 있으면 맞고 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현상이 팽배..
“내가 즉위한 이래 23년 동안 우근(憂勤)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따를 방법을 강구해 왔지만 어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1799년 12월, 겨울 같지 않은 날씨에 천둥 번개가 계속되자 날이 밝기도 전에 신하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정조가 건넨 고백이다. 정조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며 어떤 질책과 건의든 달게 받을 테니 천재지변을 해소시킬 방법을 내놓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무슨 말이든 해달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중직을 맡고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을 범한 이들이라며 당장 내치고 벌해달라고 하였다. “경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돌릴 필요 없다. 모두 나 한 사람의..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양극화’다. 양극화는 ‘서로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짐’이라고 풀이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라면 누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애써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조장하여 거기서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극화가 불가피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채 재벌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이는 더욱 가중되어서,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출발선이 아예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분노한다. 양극화가 경제적인 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이 시대의 진정한 아픔이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눌 수 없는 슬픔과 분노로 이 사회 구석구석을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 이들과, 교통사..
처음 천재지변을 만났을 때 전하께서 통치의 잘못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바로잡기를 그 당시 애절하게 내리셨던 말씀만큼만 하셨더라도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실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으니, 일이 있을 때마다 내리신 말씀들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만, 신은 ‘하늘이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사람 역시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들어서는 전하께서 조언을 구하셔도 신하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호응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말씀에 애초부터 진정성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사헌부의 지적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사실과 다르게 전달된 것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 말씀을 믿..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연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절로 나오는 의문이다.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 하나하나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엄청난 아픔이고 절망이다. 정권 말기에 권력자 주변의 전횡이 밝혀지곤 하는 것은 언제부턴가 익숙해진 풍경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렇게 분노를 넘어서 아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나름대로 이루어왔다고 생각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근간이 속속들이 무너져 내려 있는 암울한 현실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농단(壟斷)은 본디 시장 주변에 높이 솟은 언덕을 뜻한다. 다들 소박해서 그저 남에게 팔 만한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과 맞바꾸던 시절에 어떤 장사꾼이 ..
“꼭두각시 줄 끊어지자 진면목이 드러나고 도깨비들 햇빛 비치자 소굴 찾아 숨는구나.” 조선 경종 때 목호룡이 이희지의 작품이라며 고변한 시의 일부다. 진위와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 시는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고변한 측의 풀이는 이렇다. 경종이 모든 처분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두 명의 내시에게 의지했는데 그 내시들이 처벌되자 결국 본색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고, 주변의 음흉한 무리들도 다 숨을 곳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가 당나라 한유가 영정(永貞) 연간의 상황을 그린 의 모티프를 차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은 무능한 임금과 그에 빌붙어서 잇속만 챙기는 이들을 비판한 작품이다. 당시 순종은 중풍을 앓아서 벙어리가 되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궁궐 깊은 곳 ..
이식(耳食)이라는 말이 있다. 소동파가 견양 지방의 돼지고기 맛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사오게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서 끌고 오던 돼지를 잃어버리고는 동네 돼지를 사다가 바쳤다. 그 사실을 모른 손님들은 요리를 맛보고서 역시 견양 돼지는 다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처럼 평판에 가려서 실질을 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귀로 먹는다고 한다. 조선시대 하징이라는 사람이 땅딸막하고 절룩거리는 말 한 마리를 헐값에 샀다. 절룩거리던 다리는 어느새 치유되었고 그 짧은 다리로 잘도 걸어서 하루에 수백 리를 갈 정도였다. 하도 볼품없고 특이하게 생겨서 지나는 이들이 가리키며 구경하기에, 하징은 장난삼아 일본에서 들여온 ‘왜당나귀’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들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큰 값을 치르고 사겠다..